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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미희 시인 / 일기의 언덕을 넘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4.

조미희 시인 / 일기의 언덕을 넘어

 

 

마음의 날씨를 위로하는 습관이 생겼다 습관은 언덕 너머 골짜기의 연약한 새 한 마리, 아무도 보지 못하게 꼭꼭 싸맨 그곳처럼

 

우울한 우산과 쫑긋한 예민함이  뒤에서 격렬하게 다투고 있는 계절이다

 

오늘의 기분은 가래침 맛이라고 쓰고 감정을 토했다

하얀 종이 위에 질펀한 오물

 

이성을 묶어놓기 위해 소비하는 감정을 누군가 슬며시 커튼을 젖혀 훔쳐보고 있다

 

날씨와 계절은 매번 오늘 위에서 맑음과 흐림, 비와 눈을 데리고 지나간다 언덕 아래는 어떤 기분들이 모여 가끔 자신도 모르게 고이고 흘러간다

 

네가 던진 폭설과 내가 던진 꽃이 우리의 세계에 이상기후를 가져왔다

 

새가 실낱같은 발바닥을 떨며 종이에 앉아 일기의 페이지를 찢는다

페이지를 빠져나온 날씨들이 흩어져 울타리를 벗어나 거품처럼 가라앉는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조미희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15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자칭씨의 오지 입문기』(시인수첩, 201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