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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윤정 시인(상주) / 계단의 기원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4.

이윤정 시인(상주) / 계단의 기원

 

 

맨 처음의 옥탑은 새순이 무성한 나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계단은 반드시라는 말과 짝을 이룬다

 

계단은 엎질러지는 것들의 천적

발을 헛디뎠을 뿐인데 너무 많은 몸이 헐고 굴러 내려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된

사과나 혹은 복숭아 들은 모두 멍이 들어 있다

 

아무 가진 것 없는 저녁이어도

오르지 못하고 떨어진 것들이 앉아 있는 계단은 가파르다

 

올랐다 내려가는 고행의 길을 인내하는 동안

사람들은 무릎을 조련당하고도 계단에 기원을 심었지

 

한밤 모두 잠든 시간

아코디언 소리가 난다

폈다 오므렸다 하루를 반복하는 무릎의 하모니

어슴푸레한 상처의 퍼즐을 맞추며

나는 오늘 밤도 계단을 오른다

 

수많은 발자국의 말을 다 받아 준

계단은 입을 봉합하고 통증을 아픔이라 하지 않는다

오를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맨 꼭대기에서

가끔 내가 흘려 버린 것들을 발견하고 주머니에 넣는다

 

짐작할 수 없는 상처를 품고 계단을 올라

세상 밖으로 날아가야 한다는 걸 무릎은 잘 알고 있다

 

 


 

 

이윤정 시인(상주) / 세상의 모든 달은 고래가 낳았다

 

 

고래 한 마리 헤엄쳐 간다

아직 자라는 중이어서 며칠 헤엄쳐 가면 보름달 같은 어미가 있을 것이다

좌표가 없어도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고래

자리 바뀐 별자리 찾아 구름의 속도보다 더 가볍게 바다를 건너간다

반짝 멸치 떼 같은 별 사이로 지나간다

 

배가 불룩한 반달이 초순에서 출발하여 중순을 지나간다

산등성이 나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면

바람이 슬쩍 들어 주는 나뭇가지

지느러미가 한 뼘씩 자라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있는 중이다

 

흰 구름 이불 덮고 잠든 고래 세상의 물을 끌어당겼다 놓곤 한다

별자리 사이로 사라지면 지상의 모든 입은

바깥쪽으로 더운 호흡을 전송하고 있다

 

싱싱한 비린내가 날 것 같기도 한 고래

4분의 3박자 동요 속을 헤엄쳐 가고 있다

 

둥글게 뭉쳐지는 것은 낡아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잉태하는 중이다

내 눈썹 위치에서 놀고 있는 고래

제 꼬리 떠난 물길을 몸 안으로 또렷하게 새겨 넣었다

 

환한 분수 하나 쏘아 올리고 천천히 심해 속으로 빠져드는 고래

둥근 달이 저 우주 속으로 굴러가면 고래의 배 속에는 새 달이 자란다

 

세상의 모든 달은 고래가 낳았다

 

 


 

 

이윤정 시인(상주) / 귀로 듣는 풍경

 

 

툭, 지팡이가 비행기를 짚으면

순식간에 날아올라 적도를 넘어간다

풍경에서 점점 멀어지는 새

나비도 바람을 접고 사라진다

 

짚을 때마다 빠르게 날아가거나 사라지는 숫자들

오른쪽에서부터 날아간 새와

왼쪽에서 달리던 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어둠에 갇히는 손짓이 있을 뿐

 

어제 작별 인사를 나누던 손은 더 이상 흔들지 못하고

접이식 지팡이를 펼치고 더듬는 수신음을 듣는다

씨앗을 남기지 못하고 날아간 꽃은 어떤 색의 통증이었을까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빈 풍경의 각도가 눈앞을 막는다

 

더 이상의 숫자로 얼굴을 볼 수 없고

옮겨 온 풍경을 귀로 듣는 날들

한 번쯤 보았던 계절이 손끝으로 지나가고 있다

멈춘 나이는 숫자로 접히고

손가락 사이로 날아가는 것들은 모두 색깔이 없다

 

하얀 지팡이가 타닥타닥 몇 단으로 접히는 저녁이 손에 있을 뿐

눈 바깥에서 비행기가 날고 꽃잎 흔들리는 곳에 나비는 앉아 있겠지

 

지금쯤 태양을 가린 달은 제자리로 돌아가 있을까

익숙한 얼굴이 없는 밤을 걸어가는 세상은 온통 경계다

 

 


 

이윤정 시인(상주)

1961년 경북 상주(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행정자치대학원 수료.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세상의 모든 달은 고래가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