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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미 시인 /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4.

김정미 시인 /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봄밤을 축문으로 써놓고

그의 장례를 치른다

 

지상에서 기꺼이 질 줄 아는 것들은

꽃의 부족인지 모른다

탄생이 호들갑스럽지 않았으니

북향으로 질 때도 죽음을 애도하는

검은 눈물 따윈 없다

아직 오전의 온도가 남아있는 오후가

통째로 사라졌다

 

고양이가 튀어 오르는 골목마다 켜진 이팝나무에는

별빛인지 그림자인지 알 수없는 근처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두고 간 산책과 고양이 사이

제 몸보다 큰 저녁을 고양이걸음으로 건너간다

 

미처 당도하지 못한 환한 달빛 부록 몇 권쯤,

흰 서표로 꽂아 놓았을 한그루 나무 같은 한 사람이

이팝나무로 눈부시게 서있다

 

보이지 않아도 이미 봄인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부서지거나 흩어진 것도 한 줌씩 모으면 둥글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골목 끝, 정류장이 어둠에 시동을 건다

먼저 굴러가는 건 바퀴가 아니라 마음이다

가고 오는 건 소리 없이도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므로

 

그는 어디쯤 도착해 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김정미 시인

1968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강원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 수료. 2015년 계간 《시와 소금》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오베르 밀밭의 귀』 『그 슬픔을 어떻게 모른 체해』. 산문집 『비빔밥과 모차르트』가 있음. 2017년 춘천문학상 수상. 춘천문화재단, 강원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08년 동서커피 전국공모 수필부문 최우수상 수상. 2017년 춘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