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미 시인 /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봄밤을 축문으로 써놓고 그의 장례를 치른다
지상에서 기꺼이 질 줄 아는 것들은 꽃의 부족인지 모른다 탄생이 호들갑스럽지 않았으니 북향으로 질 때도 죽음을 애도하는 검은 눈물 따윈 없다 아직 오전의 온도가 남아있는 오후가 통째로 사라졌다
고양이가 튀어 오르는 골목마다 켜진 이팝나무에는 별빛인지 그림자인지 알 수없는 근처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두고 간 산책과 고양이 사이 제 몸보다 큰 저녁을 고양이걸음으로 건너간다
미처 당도하지 못한 환한 달빛 부록 몇 권쯤, 흰 서표로 꽂아 놓았을 한그루 나무 같은 한 사람이 이팝나무로 눈부시게 서있다
보이지 않아도 이미 봄인 그를 이팝나무라 부르면 부서지거나 흩어진 것도 한 줌씩 모으면 둥글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골목 끝, 정류장이 어둠에 시동을 건다 먼저 굴러가는 건 바퀴가 아니라 마음이다 가고 오는 건 소리 없이도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므로
그는 어디쯤 도착해 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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