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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구슬 시인 / 골 깊은 수밀도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6.

김구슬 시인 / 골 깊은 수밀도

 

 

복숭아를 잘못 샀나보다

깨물어보니

단단하고 도발적이다.

삼킬 수가 없다.

익어가면서 부드럽고 섬세해지는 법이다.

 

오늘 설익은 복숭아처럼 굴었다.

주변 사람에게

고함을 질렀다.

후련하다.

후련하다는 건

덜 여물어 빽빽하다는 것이다.

상대는 마음으로 나를 뱉어버렸을 것이다.

 

수밀도 풍부한 과육은

익을수록 봉합선의 골 깊어진

스스로 휘어짐의 생성 결과다.

내겐 언제

깊은 골 생길까?

 

 


 

 

김구슬 시인 / 라프로그에게서

 

 

엘리엇은 라프로그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웠다.

보들레르에게서는 가장 비시적인 것도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단테에게서는 인간 영혼의 깊이와 높이를 배웠다.

엘리엇은 스스로

은폐하며 폭로하는 법을 익혔다.

그리하여 축축하고 황량한 세계를 창조했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시를 써야 한다면서

말 할 줄 모르면서

가장 시적인 시를 쓰겠다고

영혼의 다양성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모두가 조야한 세계를

번쩍거리며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김구슬 시인 / 8월, 뜨거운 그날

 

 

8 월,

그날은

뜨거웠습니다.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습니다.

삽질한 붉은 흙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8월,

당신은 뜨거운 날

저를 낳으시고

차갑게 가셨습니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싸늘하게 가셨습니다.

 

그날 이후

8월은 내내 서늘했습니다.

영정 앞에서 우리의 시선은

허공을 떠돌다 굳어집니다.

당신의 따뜻한 미소, 뜨거운 헌신 앞에

그리움은 살얼음 강물이 됩니다.

 

혹한의 겨울 날

당신은 얼어붙은 부엌에서

우리의 신발을 연탄불에 구워 안고 나오시고

막 연탄불에서 꺼낸 계란 프라이를 들고

뛰어나오십니다.

 

떨치고 학교를 향한

못된 자식이었습니다.

 

그리움의 강물이 점점 뜨거워집니다.

곧 저 강안에 닿겠습니다.

 

-시집 <잃어버린 골목길>에서

 

 


 

김구슬 시인

경남 진해에서 출생. 2009년 《시와 시학》 겨울호로 등단. 시집으로 『잃어버린 골목길』 『0도의 사랑』이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T.S. 엘리엇과 F.H. 브래들리 철학』 ,『현대 영미시 산책』 등이 있음.  현재 협성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이며 미국 UCLA 객원교수, 한국T.S.엘리엇학회 회장. 협성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 대학원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