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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연향 시인 / 봄의 내부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7.

조연향 시인 / 봄의 내부

검은 그림자 거실 바닥을 화들짝 지나갔다

새 떼가 스쳐 간 것일까

구름이 날아간 것일까

타고 남은 햇살 자국이 내 의식을 스치고 지났을까

검은 얼룩의 잔상이

멍하니 티브이에 빠져있던 오후를 흔들었다

흐린 잔상을 따라 까마귀 떼 울음이 흩어지고

날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희고 붉었던

꽃잎들 영혼이 다 날아간 것처럼

봄날의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창밖을 내려 다 보았을 때 사월의 새순들이

하늘 바깥쪽으로 가득 뻗쳐오른다

 

 


 

 

조연향 시인 / 자가격리 중

 

 

저 땅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었어

 

혹독하지만

너와 나, 우리 사랑이 물그림자처럼 깊어지는 계절......

 

 


 

 

조연향 시인 / 국경을 지나며

 

 

해가지지 않아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숲을 적시며 하류까지 떠내려오는 저녁의 호수

완장을 찬 여승무원들 일제히 창문 커튼을 내릴 때

열차는 접경 지역에서 멈칫거린다

기어코 새어드는 노을빛

바퀴는 여전히 교전 지역을 지나고 있다

조금 후 경계가 없는 초원에 닿을 수 있을까

망명의 꿈이 이루어질까

국경과 국경 사이

마약밀매 신호처럼 독수리 떼 웅성거리며 날아오르고

강기슭 부딪치며 탈주 소식을 교신하는 새떼들

우리는 결코 포로가 아니다

눅눅한 책갈피처럼 날개를 푸덕거려 본다

횡단 열차 꼬리에서 뜨겁게 숨 쉬는 행성들이여

우리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떠도는 것이다

해가 지면서 달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조연향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199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와2000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제1초소 새들 날아가다』 『오목눈숲새 이야기』 『토네이토 딸기』 『길 위에서의 질문』 등과 연구서 『김소월 백석 민속성 연구』가 있음.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강사. 육군사관학교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