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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혜진 시인 / 작살나무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3.

신혜진 시인 / 작살나무

 

 

그해 봄 기다리던 꽃은 오지 않았다

 

너를 찾아 떠난 선운사엔 동백마저 지고 없어

동백숲 시퍼런 그늘 돌아 도솔산 오른다

 

상수리 떡갈 신갈 졸참 굴참······.

 

무슨 참한 궁리라도 하시는지

온 동네 참나무들이 다 여기 모여계시고

 

기도하는 적송은 벌겋게 키가 크다

 

나는 가만가만 물가로 내려가 도솔천 뿌연 물에

손이나 닦는데

쌀뜨물 같은 물이 출렁이고

맞은편 빽빽한 참나무 숲을 헤치며 작살나무 한 그루 바쁘게

건너오시는 것 보인다

어제는 내소사 안뜰

팔뚝으로 어린 단풍나무를 낳은 느티나무가

쨍한 초봄의 햇살을 작살내시더니

오늘은 또 무엇을 작살내시려는지

막 돋은 보랏빛 꽃대가 맵다

 

─《애지》2022년 가을호.

 

 


 

 

신혜진 시인 / 너는 자꾸 나를

 

 

송내역 남광장 인도에

비둘기 하나 퍼덕거리고 있어요

은회색 깃털에 댄서처럼 날렵한 발목이

퍼덕거리다 주저앉기를 반복합니다

추락은 어느 유리창의 작품일까요

꺾인 날개가 장식품이 되어 얹혀있어요

 

구국 구국

잃어버린 중심이 웁니다 들릴락 말락

 

무언가 자꾸 그녀를 세우려 세우려다가는

노점 아주머니 야채 바구니를 부딪고 나동그라져요

급히 손을 뻗지만

갈 길이 바쁘다는 듯 그녀는 다시 허공을 퍼덕여요

 

헛짚는 발을 따라 연신 몸이 구르고

넘어진 길이만큼씩 자리가 옮겨져요

와중에도 한사코 바닥을 쪼는, 부리

 

먹다 만 햄버거 조각을 가만히 놓아두고 한 여학생이 떠나자

누군가 뻥튀기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녀 부리는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헛돌기하죠

콕콕 코코콕

헛돌고 헛돌아 존재를 증명하려는 걸까요

 

햄버거 조각 위로 뻥튀기가 쌓이고 방울토마토가 쌓이고.....

 

빌딩 높이 반사된 햇살들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뛰어내리는 시간이에요

 

 


 

 

신혜진 시인 / 유월의 빈칸

 

 

햇살 좋은 날 에덴마트 청과코너에 가면

아랫지방에서 온 새콤달콤 그녀들이 손을 잡아 이끈다

넌출들 푸르러 웅숭깊은 들 지나면

아지랑이 낯익은 길 하나 열린다

우물 뒤편 언덕의 살구나무 두 그루

늘인 가지 끝까지 열매를 매달았다

그 아래 걸어가는 어머니는 젊어서 장독대를

가꾸고 어린 딸을 가꾼다

 

옥수숫대 두런두런 어깨 두른 텃밭

기다리던 무슨 소식이라도 감춘 듯 우엉잎은 날로

무성해지는데

푸성귀 같은 딸 손을 잡고 가는 길

바람이 툭툭 살구알을 떨군다

눈시울이 신지

그녀는 가끔 머릿수건 매만지고

새콤한 유월이 그녀를 건너간다

 

-애지 여름호에서

 

 


 

신혜진 시인

경남 의령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 수료. 2020년 계간 《애지》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