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화 시인 / 안부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 부끄럽지 않게 봄을 보낼 겁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다음 계절을 기다리겠습니다.
윤진화 시인 / 초야(初夜) ㅡ전갈
나는 굴곡진 갈고리를 달고, 활처럼 휘어진 낚시 바늘을 달고. 바람을 낚는 조사(釣師)의 손끝에서 깊은 땅에 던져진 -거칠 것 없는 성격, 활동적이고 야생적인 아시안 자이언트 블루 전갈이다. 당신이 한가로이 숨을 쉬거나 벤치에 앉아 담배연기를 내뱉을 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낚시줄 드리우듯 꼬리를 내리며 당신에게 다가가도 놀라지 마라. 나는 그저 관계 맺고 싶을 뿐이다. 내가 술자리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당신을 향해 독을 쏘아댈 때 당신은 나를 밟거나 가래침을 뱉으며 지나치지 마라. 당신의 몸에 내 꼬리를 잠시 박아 두고 싶을 뿐이다.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할 빛이 어둠을 갉아먹는 방에서, 시시각각 당신의 눈빛에 의해 변하는 내 몸. 내 푸른 몸. 내 짙은 몸. 깊이를 알 수 없는 내 검은 몸. 그 몸을 끌고 서서히 문지방을 넘어 고개 돌려 당신을 떠나더라도 붙잡지 마라. 굽은 갈고리에 당신의 목을 꿰어 살고 싶지만 내 스스로 당신을 죽이지 못할 것 알기에 간다. 나는, 내 독은, 내 사랑은 당신을 죽일 만큼 강하지 못하다. 당신이 뒤척이는 것을 멈춘 한참 후에야 나는 비로소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알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을 기어간다. 당신의 살점이 붙은 꼬리가 천형(天刑)처럼 내 머리를 향해 점점 굽는다.
윤진화 시인 / 천형(天刑)에게
고양이 묻은 감나무에서 야옹야옹 우는 열매가 맺히고 들개 묻은 밤나무에서 멍멍 짖는 열매가 맺혀요 왜 그런지 나는 잘 몰라요 발가락 잃은 비둘기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길가에 구르는 돌이 왜 바다로 가 부서지는지 왜 항상 아빠보다 엄마가 슬픈지 때로 내 행복을 옆집 고양이가 왜 물고 달아나는지 난 그런 거 몰라요 죽은 사람들의 입김이 한꺼번에 바람이 되어 나의 머리칼을 헤치고 운다는 것 어느 모텔 하수구로 떠나간 정액이 내 몸속에서 시가 되어 짖는다는 것 왜 그런지 나는 잘 모르는데, 감 먹고 밤 먹으면서 왜 잃어버린 언어는 이리도 달콤한지요 야옹야옹 멍멍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양희 시인 / 가난한 시인의 노래 외 1건 (0) | 2023.05.13 |
---|---|
신혜진 시인 / 작살나무 외 2건 (0) | 2023.05.13 |
박석구 시인 / 하루에 한번쯤은 외 1건 (0) | 2023.05.13 |
문봉선 시인 / 꽃핀다 외 1건 (0) | 2023.05.13 |
정다혜 시인 / 콩밥 먹다가 외 1건 (0) | 2023.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