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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안나 시인 / 파란만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4.

서안나 시인 / 파란만장

- 밀서(密書)

 

 

바다를 오래 쳐다보면

내가 무섭다

나를 이해한다는 당신이 무섭다

애월에서 나는 파란만장이란 말을 생각했다

반백 년 동안 물결로 설레었으니

봄밤은 상심으로 가득 하고

당신과 나는 목 없는 부처처럼 이미 파탄이니

해변은 누가 묶어둔 코뿔소입니까

매화는 왜 찹쌀 씹는 소리로 핍니까

질문은 왜 배신입니까

꽃을 기록하면 봄은 베어지고

얼굴을 멈추면 표정은 무성합니다

나는 매화 아래서

칼빵처럼

가로로

감정이 됩니다

 

계간 『서정시학』 2023년 봄호 발표

 

 


 

 

서안나 시인 / 춘첩(春帖) 2

 

 

매화 가지에 꽃을 불러 아홉 가지 산나물에 찬술을 마신다

늙은 개는 하루를 굶기고 집안에서 칼질을 삼간다

붉은팥을 뒤로 던지면 매운 수선화가 피고 저수지는 뿌리가 깊어진다

 

편지를 쓰면 수심이 깊어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노래하고

매화는 아이들 여린 잇몸에 새 이로 돋아나고

 

입춘이라 쓰면 착하게 살고 싶다

매화는 시계방향으로 피고 볏짚을 태우면 정인은 매화 속에서 병이 들어

 

고서를 펼치면 화요일의 감정은 반듯하고 눈멀고 귀 멀어 매화는 무겁더라

매화향기 가두어 차로 마시면

나이 삼십에는 꽃이 어렵고 사십에는 아픈 곳에서 단내가 난다

 

커다란 돌덩이를 등에 이고 걸으면

서른 걸음마다 물결이 깊어지는데

이를 윤이월이라 부르면

풍경에도 사람냄새 깃들어 진흙 물고기가 몰려드네

 

계간 『서정시학』 2023년 봄호 발표

 

 


 

 

서안나 시인 / 컵은 부처가 틀림없다

 

 

컵은 비폭력적이다

컵은 컵 아닌 것들로 이루어졌으니

컵은 컵을 매일 반성하니

컵은 부처와 간디와 체게바라가 틀림없다

모터싸이클을 타고 밀림을 버렸으니

 

컵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목마른 자를 위해

한 잔의 진지한 부처를 품고 있지 않은가

컵은 커다란 입이 되어

투명한 뼈와 마르지 않는 피륙과

쉽게 깨어지는 취미를 지녔다

 

컵이 둥근 입술로 나를 돕는 아침

컵은 동서남북 막힘이 없고

 

뜨거운 커피 한 모금 속의

바람과 불은 컵에서 내 몸으로 건너온 것

내 혀 속의 소용돌이가 컵으로 옮겨간 것

컵과 나의 인연법이 그러하니

그래서 나는 존귀하고 아름다우며

악어처럼 쉽게 짓무르지 않으니

 

가장 높은 곳이

가장 낮은 곳이니

 

컵을 떨어뜨리면

부처는 부서집니까

 

계간 『서정시학』 2023년 봄호 발표

 

 


 

서안나(徐安那) 시인

1965년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1990년 《문학과 비평》겨울호 등단. 1991년 《제주한라일보》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으로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와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이 있음. 현재  <서쪽> 동인이며 한양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