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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영 시인 / 폐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4.

손영 시인 / 폐선

 

거침없는 질주에 기꺼이 몸을 열어 준 바다

꽁무니를 쫓아오던 갈매기 떼가

세상을 이어주고 꿈을 실어 나를 때

세상은 모두 그의 편이었다

파도에 치어

세상 끝자락까지 떠밀려온 폐선

갯벌에 누운 지 몇 해가 지났다

바람에 휩쓸릴 때마다

삐걱삐걱 금가는 소리, 살점 떨어지는 소리

높은 파도자락이 다녀간 흔적을 붙잡고

폐선의 이마 위로

갯강구 떼가 몰려다닌다

한때 몇 개의 회사를 거느렸던 그의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혔다

그가 완성한 퍼즐은 어느 날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경호를 받았던 환호나 찬사의 목소리도 모두 떠났다

이제는 요양원에 안착한 저 폐선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큰 바다로 날아가는 재기의 꿈

어느 모래밭에 묻었는지

요양원 침대에 두 손 묶인 채 기약 없이 누워있다

 

 


 

 

손영 시인 / 풀은 꽃이 되지 못한다

 

 

공원 산책로에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반원을 그리며 잘린 풀들이 파노라마처럼 날아간다

일제히 목이 잘리는 풀

예초기 날 끝에서 진한 풀의 피 냄새가 난다

 

사람이 매만져야 손끝에서 피어나는 꽃들

인부들이 튤립, 장미, 꽃 양귀비를 돌보고 있다

어느 온실에서 자라서 이곳으로 왔을까

 

공원 벤치에 앉아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딸 다섯을 내리 낳은 뒤 얻은 아들

우리는 보지도 못했던 이유식과 원기소로 키웠고

그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날에는

우리는 날벼락을 맞았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꽃처럼 자란 막내

튤립, 장미, 꽃 양귀비가 되고 싶던 나

 

아직도 예초기는 풀의 목을 자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풀들

그들은 수많은 씨를 제 발밑에 묻고 있다

풀의 자서전이 공원 바닥에 가득하다

 

『PoemPeople시인들』 2022-여름(창간)호

 

 


 

 

손영 시인 / 방

 

 

작은 방에서 여섯 자매가 뒤엉켜 지냈다

둘째언니는 잠결에 조금이라도 살이 닿으면 사정없이 밀쳤다

한여름 밤엔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살림

방의 개수를 늘리는 일에만 주파수를 집중시켰다

잠을 줄이고 버스비를 아끼고 생활비도 쪼개고 쪼개어

드디어 다섯 개의 방을 갖게 되었다

늘어난 방마다 이제는 채우는 일에 골몰했다

꽃향기와 그림자 긴 숲과 파도소리를 꾹꾹 눌러 넣었다

안방과 거실이 화려하게 채워지는 동안

지난 시간은 초라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내 품을 떠난 아이들은 다시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바싹 가물어진 거울을 닦으며

이제는 방을 하나씩 덜어내야만 했다

사춘기를 견딘 아이들과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부볐던 냄새나 소리는

아무리 해도 걷어 내지지가 않았다

옷과 책을 들었다 놓았다를 여러 날 반복해도

옷장이나 책장의 무게는 그대로였다

 

줄이는 것이 훨씬 버겁다는 것을

지나간 부록처럼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시인정신> 2019년 겨울호

 

 


 

손영 시인

경남 진해 출생. 마산교육대학 졸업. 『시인정신』으로 등단. 부천 신인상 수상. 부천 예술 공로상 수상. 2014년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금 수혜, 시집 『공손한 풀잎들』.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