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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강우 시인 / 염치없는 사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4.

심강우 시인 / 염치없는 사랑

 

 

수용을 요구하면서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사랑이 있어요

온당한 마음의 단백질을

부당한 마음을 살찌우는 데 쓰는

신종 물질대사의 사랑이 있어요

발열하는 시간의 뼈마디

따끔거리는 내구성의 인후통

기침으로 자폭하는 사랑이 있어요

 

사랑이 튀네요 당신,

당신이 잠들어 있을 때보다 더 자주

당신을 합치려면 기침을 자주 해야 할까요

 

수다스런 사랑을 위해

마스크를 준비했어요

 

당신은 죄가 없어요

당신은 당신에게 성실했어요

오래도록 당신은 당신에게 고백했어요

수많은 귀가 필요했을 뿐이죠

 

그런데 귀라는 거,

남의 코에 들어가 귀가 되기를

요구하면서 죄가 되었을 거예요

염치없는 사랑

마스크는 죄명을 나타내는 은어가 되었죠

 

 


 

 

심강우 시인 / 말뚝코로나

 

 

뚝, 부러지는 소리로 박힌

말뚝은 된소리 별이다

빙글빙글 도는

염소별의 콧김을 제한한다

자전은 공전에 속하고

공전은 우주에 격리된 밥그릇이다

 

코, 푸는 소리로 시작하는

코로나는 거센소리 별이다

엄벙덤벙 뛰는

호모사피엔스의 콧대를 제한한다

유희는 문명에 속하고

문명은 자연에 격리된 방구들이다

 

 


 

 

심강우 시인 / 핼러윈, 헬로 잭! 우리가 간다

 

 

 그날 도시의 겨드랑이는 우리 모두를 잭 오랜턴**으로 끼고 있었나 봐. 1번 출구에서 경사진 입구로 접어든 우린 내일을 알아볼 수 없었던 거지. 우린 그 순간 아직 켜지지 않았으므로. 그러니까 오르막을 오르는 긴가민가한 오늘과 조우했으므로. 우린 잠시라도 점화되길 원했지. 겨드랑이가 사타구니처럼 답답했으므로, 골목 저편에서 어제 어제 또 어제를 서명한 내가 싫은 나를 찢어 버렸으므로

 

 사실 우리의 가면과 복장은 잭, 미래에서 온 너를 속이기 위한 기만적인 신호였지. 인기 있는 악마가 되려고 안달 났지. 악마가 되어야만 악마에게 속지 않을 이유를 안다는 듯이

 

 머지않아 겨울이었고 엄마가 부쳐 올 김장김치 같은 달큰한 시간의 포기가 겹겹이 쌓여 있었지. 너도나도 끼룩끼룩 규격에 맞지 않는 날개를 버리기 위한 길이었나 봐. 축제는 그런 거잖아, 날개를 제단으로 쌓아서 비로소 온전한 몸뚱이를 얻는 것. 푹 절여지는 것

 

 내 손을 잡은 건 오 년째 알바를 하고 있는 내 친구의 친구와 또 그 손 건너 날개를 집에 두고 온 날마다 코가 길어져 걱정인 비정규직 입사 일 년째인 친구와 미안한 건 사치가 아니라고 믿는 친구의 애인이, 내 뒤와 앞과 또 그 옆엔 아무튼 사서 고생하는 게 얼마나 큰 사치인 줄 아는 수많은 표정들과 그래서 우린 너무 꽉 끼는 감정들을 입고 있었으므로 한 몸이었으므로 누구 몸 하나쯤 잃어도 금방 재생되는 유기체로 포개졌지

 

 부디 우릴 잭의 방탕함을 모방한 탕자쯤으로 단정짓지 마 당신. 그 골목에 발을 디딘 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뭐라니, 그늘로 배율을 조정하는 뒷골목은 저쪽 세계를 훔쳐보는 잠망경 같은 거라고 한 건 젊은 시절의 당신이었잖아

 

 단풍이 드는 속도로 혹은 잎사귀가 떨어지는 기미로 내일을 읽을 순 없을까. 여기까지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말. 내가 연애와 취업에서 실패한 건 여기까지다, 선의의 선을 넘지 않는 것. 그러고 보니 여기가 매번 새로운 막다른 출발점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쌓인 제단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잭이 입으로 불고 있는 성냥개비였어. 지펴진 불이 타오를수록 득의의 웃음은 붉게 현실로 번져갔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지. 누군가 우리를 잭 오랜턴으로 들고 다니리란 것을. 그건 결코 잭에겐 허용되지 않는 도구란 것을.

 

* 아일랜드에 전해지는 이야기. 잭은 악마를 기만한 벌로 사후(死後), 천국에도 지옥에도 가지 못하고 헤맨다

** 호박에 눈 코 입 모양의 구멍을 파서 만든 등으로 핼러윈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심강우 시인

1961년 대구 출생. (본명 심수철) 대구대학교 일문학과 졸업.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2013년 제15회 수주문학상 수상. 2014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시 부문 신인작품상. 2018년 소설집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으로 제29회 성호문학상 수상. 2019년 대구문화재단 주관 <2019년 개인예술가 창작지원> 수혜. 2016년 동시집 『쉿!』, 2017년 시집 『색色』, 소설집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 현재는 국어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