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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주희 시인 / 소만(小滿)즈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4.

이주희 시인 / 소만(小滿)즈음

 

 

이팜나무는 파란 대접에 쌀국수 사리사리 담고

함박꽃은 수제비로 구색을 맞춘다

조팝나무는 한소끔 끓여 몽글몽글한 순두부 찌개를 올리고

산딸나무는 가래떡을 엽전처럼 납작납작 썰어 떡국을 내놓는다

아가위나무는 보풀보풀 버무려 백설기를 쪄내고

돌배나무는 화전 지지느라 땀 닦을 겨를이 없다

때죽나무는 이가 부실한 어르신들 끼니로 흰죽을 쑤고

백당나무는 손맛 자랑하느라 조무조물 나물을 무친다

토끼풀은 부지런히 아기 주먹밥을 만들고

아까시나무는 운조루 뒤주처럼 튀밥자루 끈을 풀어 놓는다

하얀민들레는 냉이꽃 남산제비꽃 산딸기꽃과 어우렁더우렁 꽃비빔밥을 만든다

마가목은 송이송이 뭉쳐 밑반찬거리 부각을 튀기고

층층나무는 산길 오르느라 헛헛해진 이들에게 주먹밥 한 덩이씩 인심을 쓴다

 

-시집 『마당 깊은 꽃집』 중에서

 

 


 

 

이주희 시인 / 백일홍

 

 

1

아버지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또박또박 엄마에게 출필고 반필면을 했다

 

엄마 날씨 따라

국화빵이나 군고구마를 깜짝 선물했다

잔병치레 심한 엄마가

밥을 삭이지 못해 부글거리면 소화제를 내밀고

입안이 헐어 홧홧해하면 설태고(舌苔膏)를 직접 발라주었다

출장을 갈 때도 약 챙겨드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엄마 닮았다며 주홍색 백일홍을 아끼던 아버지

회사 야유회 날에는 딸기 바구니가 따라왔다

 

2

삼우제를 마친 엄마의 영정 사진이

안방 아랫목 벽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세한도>의 ‘장무상망(長毋相忘)’을 새기며

밤새의 안녕과 하루 일정을 알렸고

잠자리에 들기 전엔 모범 사원처럼 일과를 복명했다

 

아버지의 출고와 반면에

엄마의 얼굴은 천둥 치고 비바람 부는 날에도

뜨락에 활짝 핀 백일홍

 

 


 

이주희 시인

서울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6년 『시평』 가을호 신인 1차 당선. 2007년 『시평』 겨울호 신인 당선. 시집 <마당 깊은 꽃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