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시인 / 거울
요즘 거울을 보는 것이 힘들어요 내 얼굴을 볼 때면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이라고 말해주었던 당신이 생각나 미칠 거 같아요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다 당신으로 범벅이에요 그 중에서도 당신이 준 거울은 너무나도 많은 추억을 남겨 가장 소중한 것이 되어버렸어요
당신은 거기서 편안해졌나요? 날 두고 먼저 떠난 당신이 너무 안쓰럽고 슬프지만 나도 이제 당신이 준 거울로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슬픔에서 한발짝 뗄까 해요.
당신 몫까지 발버둥치며 살 테니 다시 만날 땐 거울을 들고 칭찬해줬으면 해요
이어진 시인 / 식탁 위의 풀밭
오후엔 풀밭 위에 앉아 식사를 한다 이것 좀 더 먹어 너는 접시 위에 꽃잎을 올려놓는다 아카시아 무성한 숲에서 비릿한 입 냄새가 몰려온다 이런 냄새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아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멀리서 먹구름이 후드득 떨어지고 너는 다시 아카시아 향기를 접시 위에 올려놓는다 이런, 이런 꽃냄새가 흘러넘치고 있군 조바심 나는 계절처럼 너는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생명선에 이상은 없는지 손바닥의 언덕이 웃는다 손금의 지평선에는 음식 걱정은 없을 듯 한데 깊은 눈매로 바람을 긁어모으는 손가락에선 지난 계절의 빚 냄새가 난다 풀밭 위에 앉아 다리가 네 개였던 식탁 위의 봄을 생각한다 웃음을 곁들인 지난봄은 고기를 구우며 즐거워했다 하나만 더 먹어 너는 꽃잎 한쪽을 내 그릇 위에 올려놓으며 꽃냄새로 빚을 갚을 수 있는지 묻는다 산등성이에 매달려 있던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진다 이런 냄새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아 우리는 풀밭 위에서 식사를 한다 꽃멀미가 이는지 두 눈에 꽃물 든다
이어진 시인 / 목련 기술자
꽃잎이 손톱으로 조금씩 번져오는 정류소 앞, 머플러는 바람을 재촉이며 걸었네 어머니는 나무 밑에서 무언가를 끓여내고 있었지 내일은 나무의 얼굴이, 얼굴이 좀 더 싱그러워질까 가족들을 뒤적이던 어머니,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곤 했네
일요일엔 두 손을 모으고 착한 여자가 되고 싶었네 내 무늬를 좋아하는 남자와 키스를 하고 돌아와서는 차곡차곡 빨래를 갰지 아무리 빨아도 지지 않던 흰색 팬티 위에 돋은 달[月], 얼룩이 부끄러워서, 창밖은 철마다 목련 꽃잎을 피워낸다 나무 위에서 꽃잎은 다리가 길어지고 치마 길이가 짧아지고……
공장 밖으로 하얗게 흘러나오는 여자들, 목련 하고 부르면 자물통이 잠긴 집을 열어줄 것 같다 목련을 생각하는 동안, 창문은 세탁기에서 뭉개진 꽃잎을 꺼내 빨랫줄 위에 사뿐사뿐 걸고 있다
이어진 시인 / 소파를 위한 이중주
A : 소파 위에 누워 있다 당신이 나의 눈 속에 손을 넣고 휘휘 저었던 소파다 눈이 뽑혀 창을 응시할 수 없는 소파다 모습은 볼 수 없고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소파다 햇살이 내려앉은 텅 빈 동공을 가진 소파다
B : 이 소파는 그냥 소파가 아니다 당신이 누워 있던 소파다 아니 내가 누워서 나의 아픔을 어루만졌던 소파다 마음을 알 수 없는 소파다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않는 소파다
A : 이 소파와 이 소파는 다르지 않다 이 소파는 다르다 소파 끝에 소파가 물려 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소파다
B : 이 소파는 피부의 감촉을 민감하게 느끼는 소파다 이 소파는 딱딱한 질감의 무중력을 사랑하는 소파다 감정이 사라진 소파다 어린 질감의 몸 안에 질긴 관념을 넣어주는 물소가죽 소파다 쓸쓸함을 찾잔 속에 넣고 음악을 듣는 소파다
A : 소파 위에 누워 있다 오래 누워 있으면 등이 휘어지는 소파다 소파 위에 꽃잎이 피어 있는 소파다 내 꽃잎에 입 맞추던 당신의 얼굴이 생각나는 소파다 기억이 소멸되면 죽음이 찾아오는 소파다 무릎이 굽어진 소파다
B : 등을 오그리고 앉아 당신을 기다리는 소파다 기다리다 다시 돌아눕는 소파다 돌아누워 다시 당신을 생각하는 소파다 당신도 없고 나도 없는 소파다 눈이 없는 소파 위에 내가 누워 있다 나도 눈이 없다
A : 이 소파는 그냥 소파가 아니다 내 위에 당신이 당신 위에 내가 얹혀 있던 소파다 소파는 여전히 눈이 없다
B : 햇살이 얼마나 푸른지 알 수 없는 소파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이 소파는 우리들의 소파였다가 이제 우리들의 소파가 아니다
A&B : 이 소파는 그냥 소파다 기억 속에 앉아 꽃잎을 어루만지는 단지 그냥 소파다
이어진 시인 / 시놉시스의 뒷면
물의 습성을 슬픈 화면 안에 담가놓는다백치의 풍경으로 보이는 모습은 한층 감미로울 것이다부드러운 살갗의 느낌은 관자놀이에서부터 타올랐다당신이 보내준 밤과 낮의 줄무늬에선하양과 검정의 격렬한 감정이 처형되고 있었다
그것을 복숭아가 열리는 과수원의 외연(外緣)이라고 하자당신의 지문과 나의 지문은봄이나 여름, 가을의 시놉시스를 나뭇가지마다 걸어둘 것이다나무에서 꺼낸 붉은 알맹이는 검은 눈빛 흘리고 있었는데
당신은 더 아름다운 복숭아의 계절을 찾아 떠나고그 외연(外緣)의 통조림을 내게 보내왔다혀의 관습은 과일의 온도와 밀애 한다당신을 스칠 때마다 돋아나던 눈물
나는 깡통 속에 들어가 한 개의 복숭아와 얼굴을 교환한다복숭아가 열리지 않는 계절엔 나의 저녁을 기억해주렴
*추신 :복숭아의 습관은 당신의 온도에 나의 습도를 섞었다 직박구리의 풍경 속에는 기형의 복숭아가 숨죽여 있었다 한 개의 복숭아 밑에 또 한 개의 복숭아, 어떤 복숭아의 맛은 다르다고 당신은 독특한 복숭아들을 내게 보내왔다 철 내음 속에 뿌리내린 복숭아는 당신 나무에서 알몸 냄새가 난다고 희죽거렸다 그 백치 복숭아 시놉시스를 동봉해 보낸다 부디,
이어진 시인 / 레퀴엠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닮고 싶은 것 가늘고 매력적이고 목적지가 불명확한 것 풀의 뿌리를 닮은 것 달의 웃음소리가 스며 있는 것
플롯의 구멍처럼 비밀이 많은 것 그 구멍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것
그 아기의 목젖을 열어 발성 연습을 시키는 것
아기의 목소리를 찢고 나온 나무가 허공 위로 뛰어내리는 것
목소리의 날개는 꽃의 신발처럼 가볍게 하강하지
아름다운 이야기는 날개 밑에서 산산조각나지
얇고 가느다란 입술을 닮은 것 어린아이의 목청에서 핏물이 솟아오르는 것
계단의 뒤꿈치를 뛰어내리는 운동화
다급하게 달려가는 고양이와 검은 계단을 오르는 그림자
입 벌린 음계 위를 걸어가는 발자국 자꾸만 벌려진다는 입
발성하고 싶은 순간의 뒤통수를 비추는 달빛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닮고 싶은 것 길고 매혹적이고 목적지를 모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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