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아 시인 / 구관조
큰 산 하나가 있다 그는 기다림의 달인이다 몸이 시우쇠처럼 무거울 때 그를 찾는다 어린아이마냥 입을 크게 벌리고 끝말잇기 놀이를 한다 내 고인 말들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그는 마르지 않는 샘,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내 안의 말들, 그를 만나기 위해선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딱따구리의 노래와 만나곤 하는 참나무숲, 뿔 세운 낙엽송 아래를 지나 신발이 흙 두꺼비를 닮을 때쯤, 우렁우렁 마중 나온 그와 만난다
나를 흡혈하던 유물론은 잠시, 안녕
고갯마루에 올라 입을 연다 콘크리트를 입었던 말들이 우르르 달려나온다 해소 기침이 끊이지 않던 생의 가건물들, 나무가 된다 숲이 된다
은빛 메아리로 불 켜진 산 퍼드득, 내 안에 살고 있는 구관조 싱싱한 말들이 날아오른다
-《우리시》 2007년 5월호
전정아 시인 / 생사의 경계에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는 퍼렇게 변해버린 손을 내려 놓았다 끊임없이 뛰었을 심장은 박동을 멈추고 침묵 속에 들어가 통나무처럼 누워있다 그가 내려 놓은 것들은 무엇일까 숱한 파도를 이겨내며 살았을 그의 몸마다 허무로 가득 차 있다 분명한 것은 그와 나 사이엔 이미 넘을 수 없는 경계의 선이 그어져 있고 어젯까지 그와 내가 우리라는 울타리 속의 파도였다면 지금은 그만 혼자 낯선 모습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퇴적작용을 거치며 세월 속에 풍장될 것이다 이글거리던 태양도 숨을 멈추자 곧 싸늘해졌다 동행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 그 곳에도 별이 있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끝이 아니라고 끝을 부인하며 손을 내려놓지 않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전정아 시인 / 죽겠다 가족
마을 정자를 찾은 팔순 노모 지팡이에 끌려온 엉덩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히며 죽겠다 죽겠다 오십 후반 아들 애인 기다리듯 문짝에 두 눈 박아 놓고 가게세도 못 건진다며 죽겠다 죽겠다 삼십 초반 손자 벼룩시장 이 잡듯 뒤적이다 오라는 곳 없어 죽겠다 죽겠다 열살 먹은 증손자 책상에 영어몰입교육 책 펴놓고 뻣뻣한 혓바닥에 휘말려 죽겠다 죽겠다
데엥 데엥 소불알시계 열 두 시를 알리면 앞 다투어 배고파 죽겠다 죽겠다
점심 후 짬 내어 아들은 팔순 노모 팔다리 주무르고 손자는 아버지 등 두드려 준다 증손자 손자 어깨에 올라가 목청 큰 기마병 된다
이구동성 쏟아내는 말 좋아 죽겠다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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