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왕용 시인 / 과목과 노인
지난 여름과 가을의 열매 모두 어디로 보내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눈맞은 과목 사이로 어깨 꾸부정한 노인 다가오고 있음.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로 발자국 함께 오고 있음. 눈사태 속에서 잠시 눈그친 오늘 아침. 이제는 노인 과목 흔들며 가지의 눈송이 털면서 마른 기침으로 오고 있음. 산책하기에는 이른 시간. 드디어 과목 붙들고 제자리에 섰음. 가지보다 앙상한 손가락 가지마다 눈뭉치 매달고 있음. 휘파람 소리까지 내는 노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 보이기 시작함. 매달린 눈뭉치 자꾸 떨어지고 떨어지는 눈뭉치 과일알 줍듯이 주워가면서 점점 빨라지는 동작 노인의 것 아닌 젊은 기운으로 피어오르고 있음. 다시 눈내리기 시작하고 점점 굵어지는 눈발 속에서 노인의 동작 그칠 기미 보이지 않음.
-시집 <섬 가운데의 바다> 에서
양왕용 시인 / 도선渡船을 건너며
차도 사람도 싣고 건너 다니는 철제 나룻배 위에서 걸문개 쪽 바라본다 도선장보다 훨씬 안 쪽 신청 끝에는 햇살 물결과 함께 빛나고 하루에 한 번씩 오가던 여객선 위에서의 그 시간은 언제나 설레임과 그리움 때문에 불안하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비로소 깨닫는다. 어쩌다 큰 바람 부는 날 실낱같은 그 이어짐도 끊기고 섬 속에 갇힌 동안에는 유난히 육지가 손짓하였다. 육지물 먹다가 돌아와 있던 여름 겨울의 바람 부는 날에는 더욱 크게 손짓하였다. 그러나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그리움이 샘 솟는 법. 불혹을 훨씬 넘긴 오늘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가면서 더욱 더 새로운 그리움으로 내 마음 설레이고 있다.
-시집 <섬 가운데의 바다> 에서
양왕용 시인 / 달려가면서 보는 바다
섬이 달려간다. 섬 가운데의 산들이 달려간다. 산마루 위의 나도 달려간다. 그래도 언제나 저 아래 쪽 바위에다 몸부딪치며 손짓만 하고 있는 그대는 나에게 무엇인가? 산 너머 육지 쪽에 간혹 걸리는 무지개와는 달리 둘음소리도 내고 웃을 때마다 흰 이빨 보이는 그대는 나에게 무엇인가? 한낮의 모래밭에서 그을린 몸둥아리도 아니고 밤마다 날아다니며 살아있음 보여주는 반딧불도 아니면서 달려도 달려도 와락 나에게로 안겨오지 않는 그대는 나에게 참으로 무엇인가?
-시집 <섬 가운데의 바다> 에서
양왕용 시인 / 폭설暴雪
빌딩이란 빌딩들 모두 창에다 못질을 하고 아스팔트 위로 온통 체인 투성이의 타이어들만 굴러가고 있음 사람이란 사람들 흰 마스크를 한 채 눈뭉치에 입이 막힌 듯 숨가쁘게 귀가하고 있음. 돌아갈 곳 없는 사내들은 눈발속에 파묻힘. 거리는 질서잡기 위해 실려온 다른 사내들로 더욱 무질서해지고 있음.
-시집 <섬 가운데의 바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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