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임헤라 시인 / 나는 구두가 없어요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5.

임헤라 시인 / 나는 구두가 없어요

 

 

저 구름보다 아름다운 구두를 본 적이 없어요

기분에 따라 변하는 부드럽고 신비한 저 가죽은

수양버들이나 노을이나 봄을 벗겨 만들었다고 믿어요

아무렇게나 누워 나는 하늘에 발을 대어봐요

날마다 크고 작은 구두들을 신었다가 벗으면서

하루 수백 켤레의 구두를 보내주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요

해안에서 산기슭까지 버려진 구두들이 쌓여 있어요

나는 언제까지 발에 맞지 않은 구두를 신어봐야 할까요

세상의 모든 구두는 젖어 있게 마련이고 비어 있어요

나는 구두가 없어요 맨발을 거두어 횡단보도에 서지요

라면 국물로 배를 채우고 편의점을 나서지요

오늘도 공중에는 어느 순례자의 장례식장처럼

수많은 구두가 모여 있어요

나는 하나하나 발을 넣어볼 작정이에요

발을 넣으면 금세 쏟아져버리는 구름도 있겠지요

그렇게 빨리 닳아버리는 구두를 본 적이 없어요

 

 


 

임헤라 시인

2015년 ≪시와 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화요일 자정에 걸을 수 있는 여자는 모두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