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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명란 시인 / 일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5.

최명란 시인 / 일출

 

파도가 갯바위 무거운 몸을 씻겨요

 

바다의 어마어마한 사정을 어찌 알까만

 

새벽비가 파도 표면에 닿자마자 둥글게 뒤척이고

 

난 삶은 알을 까다가 경박한 손끝이 찔렸어요

 

주홍 피 한 방울 톡 동그랗게 솟아요

 

이토록 둥근 몸에 가시를 숨겼으니

 

고독한 눈을 감았다 떴다 떴다 감아요

 

어쩌나~ 최후의 나의 사랑

 

당신은 죽은 나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해묵은 옛사람들은 무슨 재주로 다 사라지고

 

비보다 수척한 물보라의 중보기도만 들려요

 

이 가느다란 기도가 파도였나 말이죠

 

나는 당신의 고통 없는 부화

일정한 산란

불안정한 균열

싱거운 떨림

 

사랑의 낟알을 품은 바다가 어제 해를 밀어 올려요

 

이럴 때 꼭 조심성 없는 새벽 암탉이 높게 울어쌓아

 

여명은 반드시 경쾌한가 말이죠

 

 


 

 

최명란 시인 / 철쭉​

 

꽃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다 함께 웃고 있어요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최명란 시인 / 물 먹지 않기 위하여 노력한 시

 

 

그동안 나는 물을 너무 많이 먹었다

물 한잔하고 가라고 바람난 강물이 내 옷깃을 붙잡아도

지금 나는 결코 물을 먹지 않는다

물을 먹지 않아야 내가 물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물이 되지 않아야 내가 물 먹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기어이 물을 먹지 않는다

목이 타고 끝내 몸까지 말라 없어지게 되었을 때

다솔사 마당의 텅 빈 나무 속에 들어가 쪼그리고 있을 뿐이다

쪼그린 채 갈증이 허연 혀를 내밀고 쓰러지면

속이 텅 빈 나무 꼭대기의 하늘로 뚫린 구멍 속으로

하나 둘 눈물 그렁그렁 맺힌 별들을 따먹을 뿐이다

목이 탄다고 물을 먹는 일은 아무래도 물 되는 일이다

목이 탄다고 물을 먹는 일은 아무래도 물 먹는 일이다

 

-최명란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중에서-

 

 


 

최명란 시인

1963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세종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 『자명한 연애론』 『명랑 생각』 『이별의 메뉴』가 있음. 동시집 『하늘天 따地』 『수박씨』 『알지 알지 다 알知』 『바다가 海海 웃네』 『해바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