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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여원 시인 / 오리의 계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9.

이여원 시인 / 오리의 계절

 

 

열 두 개의 숫자들, 둥근 시계 안에 흩어져 있다

시침 밑으로 분주한 초침이 물 갈퀴질 중이죠

계절풍과 물가의 산란産卵을 끝낸

몸속의 시계가

징검다리처럼 물을 건너고 있죠

 

물의 상피, 굳어져가는 호수는 단호하다

새 을乙 자의 숫자들,

모두 아랫배 쪽이 젖어 있지만

햇빛 얹혀 있는 곳은 모두 등이죠

숫자가 숫자를 앞지르지 않듯이

아무리 거센 물살에도 뒤로 가지 않는 시간들

언젠가는 다 날아갈

추운 계절의 시간들이죠

 

누군가 돌을 던지면

흔들리는 수면 위로 겁먹은 숫자들이

제 발자국을 가슴에 붙이고 날아오르죠

 

쥐눈이콩 같은 까만 눈으로

별이 춤을 추는 것, 구름이 집을 넓혀 가는 것,

바람이 아이를 낳는 것, 나무가 이사를 가는 것

다 본 매서운 눈

그 눈으로

수만리를 날아와 천연스레 엉덩이를 세운 채

계절을 고르고 있죠

 

물 뒤를 오리가 따라갔다고 생각했으나

오리가 물을 끌고 가는 것을 보았죠

 

 


 

 

이여원 시인 / 롤리타

 

 

나팔꽃 두 송이가 넝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간지러운 듯 목을 움추리며 귀가 어깨에 닿아 있네

가늘고 인 설득의 방망이질

솜털을 지나 봉곳한 가슴을 지나 간지러운 곳들을 옮겨 다니네

돌고 있는 레코드 사이로 나선형의 피가 배어나오고

상상하는 곳마다 검은 리본의 머리띠가 생겨나네

 

부주의한 곳들마다 열리는 원피스

얼굴과 표정은 서로 모르는 사이라네

 

발을 굴려 그네를 하늘로 띄우면 발바닥과 손바닥은 아직은 청결해

무릎이 허벅지 위로 자란다네

 

불구가 된 단어는 당신들의 것이라 외치자

설득이 입을 깁고 있네

장난은 작아서 장난 뒤에 숨기에 충분하고

손을 열고 뺨을 바꾸는 약속을 자주 한다네

어른과 소녀 사이에 보철을 한 웃음이 둥둥 교정중이네

원피스자락을 들추는 공중놀이는 익숙한 스릴

소녀도 여자도 아닌 것이 텀블링으로 뒤집네

 

흉내를 흉내 내며 거짓말은 꼬리가 있어 날마다 자란다네

혀끝은 불붙은 램프 심지 같아

거리 둔 직계들은 그 곁을 비껴가려 하네

수인성으로 번지는 분홍색의 꿈을

한낮의 그림자가 가위질 하네

친절한 소녀가 흘리는 말은 번개처럼 위험하다네

 

 


 

 

이여원 시인 / 오른쪽 심장

 

 

오른쪽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습관이 있다

오래 전 옮겨둔 오른쪽 심장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뚜껑처럼 반지를 끼워 둔다

약지의 의미는 반짝이지만

세상의 어떤 약속도 묶여 있지는 않다

 

외투를 걸친 심장, 진분홍 엽서를 손에 쥐고 있던 날

왼쪽 가슴을 심하게 맞은 적이 있다

비명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오른쪽으로 심장을 옮겨놓는 날은 온종일 비릿한 비의 냄새가 났다

 

나는 백지였다

 

흘러나가는 여름의 끝을 막고 있는 붉은 저 꽃들

언젠가는 뚜껑이 열리듯 꽃 떨어지면

심장이 없는 한 계절을 견뎌야 할 것이다

 

구름의 희생으로 우기가 이어지듯

군주지관다운 색다른 네 개의 방 그 일정 끝난 뒤

실핏줄 같은 실들이 빼곡히 들어찬

사과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백야의 흰 마음들

 

내가 아는 심장은 상처가 너무 많다

오래된 상처는 지나간 바람이 촘촘 박혀 있다

묵혀둔 방을 치우듯

반백년의 그늘을 끓여 지금은 차를 마시는 시간

오른쪽 심장으로 사는 날이다

 

<우리詩> 2012년 여름호

 

 


 

이여원(李如苑) 시인

1957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빨강』(현대시, 2019)가 있음. 2015년 제16회 시흥문학상 대상 수상. 2018년 아르코 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