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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석남 시인 / 수묵(水墨) 정원 9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9.

장석남 시인 / 수묵(水墨) 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시인 / 큰  눈

 

 

큰  눈이  오면,

발이  묶이면,

과부의  사랑 舍廊 에서처럼

편안함이

일편  근심이

뒤주  냄새처럼  안겨온다

 

큰  눈이  오면,

눈이  모든  소란을  다  먹으면,

설원 雪源과  고요를  밟고

와서  가지  않는  추억이  있다

 

한  치씩  나앉은  사물들  모두

제  아버지가  온  듯

즐겁고,  희고

무겁다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문학동네,  2012

 

 


 

 

장석남 시인 / 물과 빛과 집을 짓는다​

조감도를

그린다 눈을 감고

빛이 오는 쪽을 바라보고 그림자를

앉힌다

나무를 심고 나무가 자라고 나무가 석양 속에 서서 굽어 보는 장소

에 방을 앉힌다

나무의 빛이

초승달이 되고

북두칠성이 된다

하나 둘 셋 넷 다서 여서 일급 일급 일급

기울어진다 .

부엉이도 옛날처럼 찾아오리

비가

온다 빗금으로 오고 김장 청무우가 젖는다

빗물받이 홈통에 한 줌씩 내려앉는

하늘의 기별

귀가 부스럭거리며 무너져내리고

개울을 따라 흘러가버린다

집은 하늘의 귀를 가져서

빗물의 고백을 빠짐없이 듣는다

이슬의 노래를 듣는다

눈보라의 독백은

오래 앉을자리가 없다는 것!

별과 별자리 움찔움찔 지나간다

그리고

집이 빈다 숨결은

상강(霜降) 후의 칸나처럼 상부의 붉은 꽃대를 놓는다

거미줄에 이슬 맺혀 잠시 반짝인 시간을 묶고

담이 넘어가고 바람이 야윈다

아무렇게나 퍼져나간 국화가 향기를 뿌린다

쓰러졌다 일어서며 핀 백일홍 붉음!

아무 보는 이 없이 피는 꽃이

더 짙은 까닭은

아무 보는 이 없기 때문

아무 보는 이 없기 때문

나는 매운 재로 누워서

눈을 감고 집을 짓는다

그는 매운 집을 짓는다

 

 


 

장석남(張錫南) 시인

1965년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 출생. 1986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방송통신대 학사 졸업.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졸업.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수료.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시단에 등단.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출간. 1992년 제11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4년 대산문학창작지원금 수혜. 1999년 제44회 현대문학상. 2010년 제10회 미당문학상. 2012년 김달진 문학상. 2013년 대구 상화시인상. 2018년 제28회 편운문학상, 제18회 지훈상 시 부문 수상. 1993-2003년 계간 『황해문화』 창간 편집장 및 편집위원.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