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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금진 시인 / 조용한 가족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9.

최금진 시인 / 조용한 가족

 

 

노파는 파리약을 타 마시고 죽었다

광목으로 지어 입은 속옷엔 뭉개진 변이 그득했다

입 속에 다 털어 넣고 삼키지 못한 욕설들이

다족류처럼 스멀스멀 벽지 위를 오르내렸다

어디 니들끼리...... 한번 잘 살아봐라......

스테인리스 밥그릇처럼 엎어진 노파의 손엔

사진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손아귀에 모아진 마지막 떨리는 힘으로

노파는 흙벽을 긁어댔으리라, 뒤집혀진 손톱

그 핏물을 닦아내는 여자의 완고한 표정을

노파는 허연 게거품을 물고 맞서고 있었다

호상이구만 호상, 닭 뼈다귀 같은 노파의 몸을

꾹꾹 펼쳐놓으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코를 막았다

서랍장 곳곳에서 몰래 먹다 남긴

사과며 과자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말고도

썩은 장판 밑에선 만 원짜리 몇 장이 더 나왔다

발가벗겨진 노파의 보랏빛 도는 입엔

서둘러 쌀 한 줌이 콱 물려졌다, 복날이었고

뽑힌 닭털처럼 노파의 살비듬이 안 보이게 날아다녔다

 

 


 

 

최금진 시인 /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 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2001창비신인상  당석작 겨울호

 

 


 

 

최금진 시인 / 고흐와 함께 하는 달빛 감상

 

 

밤하늘엔 잘려나간 귀 하나가 걸려 있고

달빛을 물고 날아드는 환청을 그는 아파했을까

간지러워, 종일 호밀밭을 뜯어먹는

노란색을 누가 치워줬으면 좋겠어, 아버지는 당나귀,

사제관에서 노동하도록 서품을 받았지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서 맹세를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 저는 훌륭한 사람을 그릴 수가 없어요,

온 몸의 털을 세워 어둠을 터치하는 삼나무들만 눈에 보여요

그는 울었는지 몰라, 해바라기 위에 머무는 빛에 눈멀어

훔칠 수만 있었다면 무덤이라도 팠을 거야

모든 색의 혼합인 어둠, 속에 뜨는 별들

까페와 중절모와 붓꽃 위에 소용돌이치는 별들, 미친!

날아다니는 물고기와 비릿한 석양 그리고

한 곳을 맴도는 바람과 회중시계와 개미, 미친!

왜 어떤 이들은 나서 그런 것에 제 귀를 대어보는 걸까

생레미 요양원 위로 달은 다시 뜨고

달은 그의 접시안테나, 보청기, 투명한 비닐 백

그는 방부제 처리가 되어 어둠 속에 누워있다

잘려진 귀 한쪽이 공중에 떠다닌다

무심한 듯 혹은 아주 근심스럽게

어린 풀꽃들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숨을 쉬고 있다

 

-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당선작 -

 

 


 

 

최금진 시인 /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

 

 

주인 없는 황량한 뜰에서 아그배나무 열매들은 저절로 떨어지고

내가 만든 편견이 각질처럼 딱딱하게 손끝에서 만져질 때

아침엔 두통이 있고, 점심땐 비가 내리고

밤새 달무리 속을 걸아가

큰 눈을 가진 개처럼 너의 불 꺼진 창문을 지키던 나는 이제 없다

그때 너와 맞바꾼

하나님은 내 말구유 같은 집에는 다신 들르시질 않겠지

나는 어머니보다 더 빨리 늙어가고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안되는 행복한 흉내를 거울은 조용히 밀어낸다

혼자 베란다에 설 때가 많고, 너도

남편 몰래 담배나 배우고 있으면 좋겠다

냄새나는 가랑이를 벌리고 밑을 씻으며

습관적으로 욕을 팝콘처럼 씹어 먹고

아이의 숙제를 끙끙대며 어느 것이 정답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너무 많은 정답과 오답을 가진 머저리, 빈껍데기 아줌마가 되어

네 이름을 새겨놓았던 그 아그배나무 아래로

어느날 홀연히 네가

툭, 툭, 내 발 앞에 떨어져내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세상에 종말이 오겠지

위대한 경전이 지구를 돌아 제자리로 올 때까지 걸린 시간

사랑한 자들이 한낱 신의 노리개였음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

트럭이 확 몸을 밀고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던 날들이었다

뽀얗게 분을 바르고 우는 달을 보면서

여자들은 잃어버린 자신의 청동거울을 떠올리고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술을 끊으라는 의사의 조언은 거짓이다

나는 이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하나님은 아그배나무 속에 살지 않고

그 붉은 열매 속에도 없고, 그 열매를 따 담은 내 주머니에도 없으니

그런가, 너도 나처럼 무중력을 살고 있는가

함박눈 내리던 그날 내 손에 잠시 앉았다 날아간 새처럼

너도 이 밤에 젖은 휴지처럼 풀어진 날개를 접고 앉아

사랑과 슬픔을 혼동하고 있는가

여기가 지옥이 아니라면 분명 꿈속일 것인데

내가 꾸는 꿈엔 나비와 꽃과 노래가 없으니

사랑이 없는 시간, 사랑이 없어도 아침이 오는 시간

주인 없는 뜰에서 아그배나무 열매는 아픈 목젖처럼 빨갛게 익어가고

하나님은 더듬거리며 너를 찾다가 나와 함께 어두워져

마침내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단다

 

- 최금진 시집〈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 | 2014 -

 

 


 

최금진 시인

충북 제천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7년《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과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이 있음. 2008년 제1회 오장환문학상, 2019년 제 12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등 수상. 동국대, 한양대 등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