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겨리 시인 / 꽃의 자세
철개지 듬성듬성 핀 꽃들의 꽃대가 다ㄴ자다 수직에 매달려 수평의 꽃을 피우기 위해 ㄴ의 각도를 유지하며 절벽을 움켜쥔 악력. 직립에서 횡립으로 진화될 수밖에 없기까지 노란꽃은 간절함 붉은꽃은 절규의 은유 꽃은 피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듯 꽃말이 신중한 꽃들은 빛깔이 꼿꼿하다 추락을 견디기 위해 관절이ㄴ자로 휘어질 때 뿌리는ㄱ자의 갈고리가 되어 얼마나 오래 절벽에 매달려 있어야 했을까 목덜미에 부리를 묻고 외발로 서서 꿈을 꾸는 새들처럼 낭떠러지에 뿌리내린 꽃들의 악착, 부서진 시멘트 틈 사이로 드러난 철근과 기둥에서 불거져 나온 구부러진 못과 골다공증을 않는 어머니 무릎도ㄴ의 자세이다 농도와 체위는 다르지만 통증의 접미사가 된 무색무취로도 멀리 도약하기 위한 도움닫기 자세이기도 한 꽃의ㄴ, 절벽에 핀 꽃들의 수화를 읽을 때는 빛깔은 자음으로 꽃대는 모음으로 읽어야 한다
김겨리 시인 / 가뭄의 등골
물결이 고스란히 굶어 죽어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채 저수지 바닥에 누워 있다 쩍쩍 갈라진 강바닥은 물결의 사체, 익사한 소금쟁이도 부장품으로 풍장을 견디고 있다 퉁퉁하게 살찌는 건 염천뿐, 왕성한 식욕으로 제 토사물마저 핥아먹는다 붉은 비린내가 진동하는 땡볕의 어금니에 씹다 만 그늘이 끼어 있다 죽음을 경험하며 태어나는 것들은 사후가 분명하다 나무의 장례를 준비하듯 상주가 될 땡볕의 어깨에 검은 완장이 채워져 있다 생식기가 바싹 말라서 비틀어진 꽃은 물이 다 증발해 쭉정이만 남은 저수지의 수심 같다 스스로를 운구하는 바닥들, 사인이 고독사로 규명된 막다른 골목 끝 집의 한 사내의 거죽도 저러했을까 지느러미가 있었던 기억조차 퇴화되었는지 뼈대만 남은 페어가 부레를 껌벅거리고 있다 부력이 중력을 거스르는 정오 열기만 뿜어대는 꽃들의 사정射精이 필사적이다 쇠똥구리가 지구를 굴리듯 물결의 사체를 돌돌 말아 굴리고 있다 아지랑이의 부레가 죽방렴과 흡사한 건 표류하는 몇 모금의 바람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다 나무 그늘이 익사한 강바닥을 아지랑이가 기어가고 있다 갈망하는 한 씨앗은 발아를 꿈꿀 것이고 말라비틀어진 저수지의 젖꽃판을 물고 있는 땡볕이 바람의 슬하를 떠듬떠듬 읽고 있다 소금쟁이의 유해가 낙관으로 갈음되는 오후, 발표를 마친 그늘의 사체를 물어 나르는 개미 떼의 긴 행렬이 저수지를 인양하듯 팽팽하다
-시집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2019. 시산맥
김겨리 시인 / 반지하 집
풀잎에 오카리나 소리 몇 방울 앉아 있다 달빛만으로도 저렇듯 고운 소리를 빚을 수 있다니 소리가 소리 없이 증발하는 동안 새들이 공중을 물어다 투명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창틈에 파랑을 발라 웃풍을 막으면 노랑이 뼛속까지 저며 오는 집 창 위에 놓인 화분에 심은 적 없이 꽃은 피어 창문 열고 더빙하듯 꽃빛을 쬐는 맨발 그걸 희망의 수사법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새의, 바람의, 벌레의, 적막의, 햇살의 집 차곡차곡 쌓인 그늘이 재산을 불리는 일 같아 밑동마다 수북이 쌓여 있는 이슬 껍질들 바람의 발자국이 있다면 아마 저럴 것인데. 그늘로 군불을 때서 습기가 무성한 벽화들이 단칸방의 머리맡까지 푸른 화염으로 번져서 살 섞자마자 태어난 몽고점들 걷잡을 수 없다 해는 잘 들지 않지만 새소리만큼은 일품인 창공이 지붕이고 우듬지가 피뢰침인 집에 매일 푸른 번개가 쳐서 밑줄만 번쩍번쩍 수만 볼트 전압에 감전된 이끼의 집이 푸르게 푸르게 활활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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