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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갑수 시인 / 항아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9.

이갑수 시인 / 항아리

 

 

넓은 들판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동물들도 배설하는 동안에는

뚱뚱한 항아리처럼

몸을 잔뜩 구부린다

잘 빚은 조각품 같다

그때 항아리에서

반죽된 거름을 내놓으며

버리고 가는 대지와 신성하게 교접한다

밥 씹어 죽으로 만들어

새끼에게 먹이는 어미들처럼

 

말없는 세상은

대체 어느 책에서

이런 지혜를 배웠길래

곰삭은 젓갈마냥

잘 익은 김치마냥

거친 들판의 풀들과 야생의 생고기들을

이렇게 담갔다가

먹기 좋은 반찬으로 빼가는 걸까

그리고 또 때가 되면

마음속 깊은 곳간 열어

그 항아리를 깊이깊이 묻어두는

세상은

 

 


 

 

이갑수 시인 / 내가 만난 나무

 

 

그것은 퍽 오래 전의 일

어쩌면 내 생년월일 이전의

일일는지도 몰라

이 집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나보다 먼저 많은 이들도 머리를 부딪힌 듯

벌써 많은 기억의 피가 배어 있는 문지방에서

처음으로 허리를 잔뜩 접어야 했던 것처럼

이 방안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의자나 장롱이 되어야 했던 나무가

팔을 부러뜨리거나 몸을 잘라야 했던 것은

 

나뭇잎 같은 옷으로 부끄럼을 가리고

나뭇가지처럼 팔을 벌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마음놓고 나무들의 굳은 상처나 딱딱한

뼈들을 만지며 놀았던 것이니,

그것은 너무나도 친한 내 유년의 혈육들

굳게 닫힌 창문을 열치며 머리를 밀어 올리자

뜰 안의 나무들도 다락방까지 따라서 올랐었지

추억은 하늘의 몫

바람처럼 흩어지고

땅 가까이 줄기만 딱딱해졌다

 

이제 드디어 나를 만나러 떠날 시간이 오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전의 이들이 그랬듯이

열매를 아래로 던져주고 허리를 또 굽히는

푸른 나무들께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싶다

내 무거웠던 몸이 부러뜨린 의자를 위하여

창가에 나무의 씨앗 하나 심어 두리라

 

 


 

 

이갑수 시인 / 하루살이의 일생

 

 

하루살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生日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물려받은 우산을 쓰고 다녔지만

비가 새지나 않을까 언제나 걱정

꼬부라진 녹슨 손잡이에

줄곧 心身을 묶어 두어야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들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너무 지루한 비에 그만

곡식이 제대로 자랄까 終日을 근심

하늘 쳐다보며 원망을 하였습니다

 

두 마리의 하루살이가 살았는데

그날 오후 늦게까지 비 그치지 않아

한 놈은 결국

검은 우산을 하늘로 알았습니다

다른 녀석은 들판에서

개구리처럼 울었습니다

 

한 녀석은 골고루 잘 썩어

넓은 들판의 기름진 거름이 되었고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다른 놈은 미끌미끌한 비닐처럼

흙에서도 썩지를 않은 채

박물관으로 가서

미이라로 전시되었다 합니다

 

 


 

이갑수(李甲洙) 시인

1959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대 식물학과 졸업.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1991년 제15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 시집 <신은 망했다> <현대적>. 자연과학 전공자라는 학력 때문에 민음사에 픽업돼 '92년부터 과학전문 출판기획자로 활동함. '사이언스 북스' '민음사' 편집부장 역임. 궁리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