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소란 시인 / 소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0.

박소란 시인 / 소녀

 

한쪽 눈알을 잃어버리고도 벙긋

웃는 입 모양을 한 인형

다행이다

인형이라서

오늘도 말없이 견디고 있다

소녀의 잔잔한 가슴팍에 안겨서

소녀는 울음을 쏟지 않고

아픈 자국을 보고도 놀라지 않지

슬픔은 유치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갈색과 녹색처럼 헷갈리기 쉬운 것

스케치북 속 흐드러진 풍경은 갈색

철 지난 이불에 파묻혀 앓는 엄마 얼굴은 녹색 짙은 녹색

아무도 놀러 오지 않는 방

고장난 인형이 캄캄 뒤척이다 잠든 방은

어여쁜 분홍색,

좁다란 창에 묶여 휘늘어진 어둠의 리본처럼

혼자서 가만히 색칠하는 소녀

다행이다

소녀라서 이대로 잠시

빨갛게 웃을 수 있어서


박소란 시인 / 울음의 방

 

불현듯 슬프다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 아주 사소한 흐느낌조차

울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 그때는 스무살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제출하고 사려 깊은 학생이 되어

조금씩 꼬깃해져하는 표정을 가방 깊숙이 밀어넣고 가까스로

열어젖힌 싸구려 자취방은 더없이 고요해

너무 낮고 너무 어두운 울음은

다른 아닌 거기에 살고 있음을 알았다

마음이 타들어갈 때마다 기꺼이 방문을 열어준

나의 울음, 엄마가 죽던 밤에도

사랑이 더운 손을 뿌리치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그 방에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아릿한 곰팡내가 명치를 꾹꾹 누르는 방

울음의 방으로 숨어들수록 울음이 아프고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증발하는 물기처럼 어느새 울음은

거기에 살 수 없음을 알았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갔음을

어디로 갔나 울음은

울음의 빈자리를 몹시 뒤척이던 나는

후미진 골목 끝

자취방은 헐리고 추진 스무살도 멀리 달아났으니

어디로, 말수가 적어 겉돌기만 하던 나의 울음은


박소란 시인 / 주소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박소란 시인 / 경에게​

 

 경아, 나는 오늘 한통의 어여쁜 편지를 받았어

 진종일 햇살 아래 흥성하던 저 바깥 막무가내로 달겨든 빗줄기에 잠시 현기증을 앓고 선 무른 벚잎들이 꺾인 고개 들어 문득 재잘거리듯

 오빠 나 촉촉이 젖었는데 와서 좀 빨아줄래?

 엉성한 스팸메일 같은, 농담 속 깃든 한줌 울음 같은 그 저릿한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는 길고 긴 답장을 쓰고 싶어졌어

 기세 성한 사내도 아닌데 다정한 오빠는 더더욱 아닌데 마음은 멋대로 부풀어 꼿꼿해져 어느새 불콰해진 아랫도리처럼 당장이라도 무슨 말인가를 흥건히 쏟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 순간 나는 왜 보도방 새끼마담이 돼버린 옛 소꿉친구를 떠올렸는지 흙으로 꽃으로 소꿉을 살듯 고운 색시가 되어 밤마다 술을 따르고 안주를 놓는다며 바랜 웃음을 토하는

 경아, 우리 언젠가 어른이 되면 저 멀리 세상 반대편 지중해로 가자 동화 속 샛말간 해변에 누워 꿈꾸듯 죽어버리자

 손가락 걸고 약속했지만 오늘도 나는 무심히 책상 앞에 앉아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고 너는 휘황한 도시의 밤거리를 기약 없이 거닐어 이 계절의 벚잎들은 금세 지고 또 피겠지만 버려질 편지를 쓰겠지만

 경아, 창백한 얼굴을 그러쥔 채 노래하고 춤추는 지중해로 지중해모텔로 2차를 떠나는 경아, 너 혹시 듣고 있니? 나 지금 촉촉이 젖었는데 와서 좀 빨아줄래?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에서

 

 


 

박소란 시인

1981년 서울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있음. 2015년 제33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노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