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 시인 / 타오르는 책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남진우 시인 / 어느 사랑의 기록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몸엔 가시가 돋아난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가시 돋친 혀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핥고 가시 돋친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을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온몸에 피의 문신을 새기는 일 가시에 둘러싸인 나는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이 다만 죽이며 죽어간다
이 참혹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외침 속에서 내 몸의 가시는 단련되고 가시 끝에 맺힌 핏방울은 더욱 선연해진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저 반란의 가시들
목마른 입을 기울여 샘을 찾을 때 가시는 더욱 예리해진다 가시가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찢고 끝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때 거세게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들
사랑이 끝나갈 무렵 가시는 조금씩 시들어간다 저무는 몸 저무는 의식 속에 아스라한 흔적만 남긴 채 가시는 사라져 없어진다
가시 하나 없는 몸에 옷을 걸치고 나는 어둠에 잠긴 사원을 향해 떠난다 이제 가시 돋친 말들이 몸 대신 밤거리를 휩쓸 것이다
남진우 시인 / 도서관에서의 기도
1 일찍이 한 철학자는 한 바구니의 책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 일용할 굶주림? 굶주림이라면 그것은 내게 너무도 충분하다 아무리 먹어치워도 질리지 않는 탐욕의 눈빛과 어둡게 입 벌리고 있는 머릿속의 허방 허겁지겁 굶주린 눈으로 먹어치우면 글자들은 텅 빈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잠시 북새통을 이루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 책들이 달려든다 화려한 표지를 치켜세우고 현란한 광고 문구와 장엄한 저자 약력을 앞세우고 날 선 종이들이 사방에서 달려와 일제히 내 몸을 베고 찌른다 나를 읽어야 해 나를 읽어달라니까 책들이 아우성치며 내 몸을 타고 오른다 빽빽히 종이로 들어찬 몸이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고 다시 꾸역꾸역 종이를 삼킨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책을 멀리할 수 있는 자만심을 주시옵고
3 매일 한 바구니의 빵 대신 한 가마의 책이 하늘 어디선가 떨어진다 떨어져 오늘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저 거대한 책더미 이를 갈며 아무리 먹어치워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저 글자들의 산 죽은 나무의 무덤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듯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그 끝없는 말의 거미줄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나는 어느덧 살진 거미 앞에 서 있다
4 지금 막 도착한 바구니를 들여다본다 아, 책 대신 누군가 띄워보낸 갓난애가 빙그레 웃고 있다 반가워 들어올리면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종이 뭉치들
남진우 시인 / 양철북
내 부르짖음에 지상의 모든 유리창이 부서져나간다면 황혼 무렵 높은 종탑 위로 올라가 나는 마지막으로 절규할 테다 박살난 유리창에서 쏟아져나온 무지개의 파편들이 허공 가득 소용돌이치다 일제히 내 몸에 박혀오기까지 끝내 남은 한 조각 유리가 내 목젖을 찔러오기까지 그래서 잠자던 내 몸 속의 피란 피가 전부 솟구쳐나와 저마다 한 방울씩 붉은 외침을 터트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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