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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선 시인 / 미스 물고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0.

김경선 시인 / 미스 물고기

 

 

가게 문을 열면 풍경소리가 들린다

아침 일찍 물고기가 운다

수문이 열리고

꼬리를 흔드는 물고기 한 마리

마른 허공에 강물을 풀어놓고 첨벙 뛰어 오른다

수선집 문이 열리고 딸랑딸랑 파문이 인다

주인보다 먼저 인사를 하는 미스 물고기

그녀의 반경은 10cm

쇠종의 시계추처럼 묶여 헤엄을 친다

노처녀로 늙은 주인 여자의 반경은 5m

여섯 평 가게에 묶여 미싱을 돌리는 미스 김

종일 페달을 밟고 달려도 늘 제자리다

어서 오세요 정말 멋져요 딱 맞아요

뻐끔뻐끔 그녀의 입에서 물방울이 쏟아진다

종일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손님이 뜸해지면

오래 전 아가미에 가두어둔 강물소리에 젖어 추억에

잠긴다

지지난해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만난 물고기

어느 강물을 거슬러 올랐는지

비늘이 헐었다

쇠종에 매달려 제 몸으로 종을 치는 종지기

그 소리 맑고 구슬프다

누가 그녀를 저곳에 매달았을까

몸값을 지불해도 저주는 풀리지 않는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고

나를 풀어달라고

물고기가 운다

수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선다

미스 물고기, 이때닷!

힘껏 꼬리를 친다

 

 


 

 

김경선 시인 / 보푸라기에 대한 예의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은 침침한 어둠을 건너는 것이다

환한 구멍을 통과하는 생을 꿈꾸는 일이다

날개 부러진 새가 날아가는 찰나인 것이다

마른 이파리 사이에서 새싹을 발견하는 일이다

 

7남매 중 둘째인 그녀,

헌옷을 풀어 반평생 보풀보풀 길을 내고

새 옷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풀보풀 걷어내는 그녀,

만삭의 몸으로 보풀보풀 호떡집 앞을 서성이던 나날,

박봉을 쪼개 자식들 뒷바라지에 보풀보풀 발 구르던 나날,

 

팔 걷어 부치고 남의 설거지를 하며 보풀보풀 뼈를 깎아내던 나날,

 

그녀가 산 세월은 닳고 닳아 헌옷처럼 보풀을 품고 사는 일

보풀보풀 온몸에 근심이 매달려 잠을 설치는 일

새벽잠을 보풀보풀 기침으로 대신하는 일

보풀보풀 세월을 거꾸로 놓고 혼잣말 속에 갇히는 일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보풀보풀 추억을 떼어내듯

스스로를 떼어버리고 싶은 보프라기,

그녀의 폐 속에서 훌쩍 커버린,

평생 떼어 내지 못한,

요양원 침대 위에서 보풀보풀 자꾸 전이되어 나간다

 

 


 

 

김경선 시인 / 양이 사라지는 저녁에는

 

 

버석거리는 저녁, 바람의 발자국소리가 들리면

태양의 입술이 타들어 가고

신을 거스르는 자들의 저녁만찬은 시작된다

뒤를 따르는 구름의 모의,

보지 못한 자들이

듣지 못한 자들이

얼룩얼룩 눈물의 입자가 깨지고

넌지시 검은 귀가 열리는 시간,

 

소리가 몸을 닫고

속고 속는 것들이 무뎌지고

먹구름이 비를 부르는 주술에

검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시간,

보이지 않는 이면(裏面)이 열리고

죽은 자가 부르는 마지막 콧노래를 기억하는 사막의 모래들

 

태양은 눈물의 마른자리를 가늠하고

눈물의 깊이를 재야만 한다.

누군가 손을 흔들어 붉은 눈물을 뿌리고

머리에서 머리로 검은 것이 건너가는 순간,

태양의 눈 그늘이 깊고 깊어진다

 

검은 구름 곁으로 돌아간 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슴을 덮고 있었던 검은 구름이 걷힐 때까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에 대하여

양이 사라지는 저녁에 대하여

 

검은 것과 흰 것이 뒤바뀌는 신기루는 더 이상 이면(裏面)이 아니다

양들이 태양을 피해 사막의 강을 건너는 저녁에는

죽은 자의 귀가 가장 늦게 닫힌다

 

 


 

김경선 시인

인천광역시 옹진군에서 출생. 2005년 《시인정신》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미스물고기』(북인, 2012)가 있음. 계간 『시인정신』 편집위원 역임.  제10회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현재 『젊은시인들』 편집장. 계간 시인정신》편집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