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인 / 슬픔- 알 44
몸은 튜브야, 오늘 아침 새 치약의 뚜껑을 열면서 몸은 튜브라는 믿음이 왔어 열심히 짜내자는 생각을 했어 내가, 나를 짜내자는 생각을 했어 이젠 네가 나를 짜낼 생각을 그만두었으니까 그렇게 되었으니까 우리들의 사랑이 이젠 그리움의 경영만으로 족하게 되었으니까 그래야 하니까 伏地不動 그래야 하니까
(웬일일까, 그 많은 소들이 오늘 아침 일시에 그 뽀얀 젖들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음악을 틀어줘도 伏地不動, 기별이 없다고 했다 동무의 목장이 큰 걱정이다)
물론 슬프지, 슬픔은 슬픔으로 밀고 갈 수밖에!
정진규 시인 / 비누
비누가 나를 씻어 준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믿고서 살아왔는데 나도 비누를 씻어 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 다 닳아져야 가서 닿을 수 있는 곳, 그 아름다운 소모(消耗)를 위해 내가 복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누도 그걸 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당도코자 하는 비누의 고향!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알 바 아니며 다만 아무도 혼자서는 씻을 수 없다는 돌아갈 수 없다는 나도 누구를 씻어 주고 있다는 돌아가게 하고 있다는 이 발견이 이 복무가 이렇게 기쁠 따름이다 눈물이 날 따름이다.
정진규 시인 / 플러그ᅳ알 2
이번 여름 전주 덕진공원 연못 가서 햇살들이 해의 살들이 이른 아침, 꼭 다문 연꽃 봉오리들마다에 플러그를 꽂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이내 어둠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좀 지나 연못 하나 가득 등불들 흔들리고 끄집어낸 어둠의 감탕들을 실은 청소차들이 어디론가 바삐 달려갔다 뒷자리가 깨끗했다 나도 플러그 공장을 하나 차리리라 마음먹었다 그대들의 몸에 그걸 꽂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좌르르르 빛의, 욕망의 코인들이 쏟아져나오는 슬롯머신! 햇빛기계! 플러그 공장을 독과점하리라 마음먹었다 플러그를 빼앗기고 모두 정전상태가 되어 있는 어둠들에게 나는 은빛 절정이 되리라 폭력을 쏘는 폭력! 폭력의 대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뒷자리가 깨끗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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