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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현선 시인 / 바람난 가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0.

최현선 시인 / 바람난 가족

 

 

오빠가 말하는 벽 말이야

어떤 유명한 시인의 시에도 나온다는 흰 벽

엄마가 그러는데 그거 가족력이래

시집온 그해에 엄마는 알았다는데

 

벽에서 자꾸 귀신같은 바람이 나오더래

 

조상 대대로 벽돌 쌓고 마감을 쳐서 어떤 비바람도 끄떡없다는데 말이야

창이나 문을 내지 않은 불편을 게으른 유전자의 특혜로 알면 살기가 편하대

 

벽이 기운 방향으로 흐르던 물의 궤적이나

수해 때 집을 할퀴고 물어뜯은 큰물의 내력도 다 혈통이래

 

철모르고 핀 코스모스, 웅덩이에 빠진 구름도 조상의 음덕으로 여기고 우아하게 가라앉히래

 

오빠가 그랬잖아

상상은 현실을 초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엄마한테 말하니까 오빠 같은 새끼를 집안 퉁소라고 한다는 거야

수재였던 오빠가 시집만 들고 다니는 걸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그래도 오빠

지금처럼 자꾸 퉁소 불다 보면

벽에서 바람 소리 들리지 않을까

 

귀신 소리 말고

진짜 퉁소 소리 들리지 않을까

 

바람이 가족력이라니 웃기지 않아? 오빠

 

-시집 『펼칠까, 잠의 엄브렐러』(상상인, 2023) 수록

 

 


 

 

최현선 시인 / 지도 접는 법

 

 

내 엄지는 힘이 없어요

 

하지만 누를 때 위력이 있죠 각서에 날인을 할 때

 

누구나 갖고 있지만 사람마다 다른 궁상문 와상문 제상문 쌍기문 그런 문들은 잊어요

문들은 그저 빚이 내게로 들어오는 통로 빚은 들어오지만

 

빛은 들어오지 않죠

 

등고선처럼 생긴 지문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끊기거나

길과 길이 겹쳐지는 곳 있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독촉장은 틀림없이 집을 잘 찾아오고

문 앞에 걸려 있고

 

지도가 워낙 정확하니까요

구글 위성지도보다 정확한 그것이

한때 손끝에 있는 뇌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살갗의 붉은 것이 한 점 혈액이 아닐까 믿은 적도 있지만

 

그것은 그냥 인주를 많이 묻혀서 생긴 혈액

 

씻으려고 물에 넣으면

물에 젖은 순서대로 말라 가는 저녁

 

시집 『펼칠까, 잠의 엄브렐러』(상상인, 2023) 수록

 

 


 

최현선 시인

경기도 김포 출생. 2019년 《발견》으로 등단. 시집 『펼칠까, 잠의 엄브렐러』(상상인, 2023) 출간. 현재 인천 시인협회 회원, 해시 문학회 동인, 선경문학상 운영위원. 형상시학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