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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추인 시인 / 모래의 시학(詩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0.

김추인 시인 / 모래의 시학(詩學)

 

 

꽃이 머금은 시를 받아 적네

유리새 유리알 노래를

시간의 옷 속 켜켜 눌러둔

바위의 시

억년 바위의 침묵을

나, 꺼내어 베껴 쓰고 있네

가을비 허공을 그어대며

 

나 좀 봐 나 좀 봐봐

 

숨길 듯 숨길 듯 슬쩍 내보이는

연하게 빗금 치고 있는 비의 발자국을

사물의 모서리들을 스캔하네

저기 저

절로 고운 것들의 말씀을

모래알들의 귀엣말을

 

 


 

 

김추인 시인 / 사하라의 신기루

 

 

오는 이 가는 이 없이

사막 가시나무

제 그림자에 묻는다

 

“저기 물위, 범선 한 척 오는 거

보이지?”

 

 


 

 

김추인 시인 / 떠도는 오감도(烏瞰圖)

ㅡ호모사피엔스의 환(幻)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잊기 위해 더 걷어내야 할 가벼움이 있습니까 갑옷을 벗어던지기 위해 더 보태야 할 무엇이 있습니까

 

몇 개 자모음을 토해 까마귀 울음으로 조합된 그녀의 기둥서방은

아직 날개 다 자라지 못한 직박구리의 시詩,

갑甲의 무거움을 죽어라 좇고 좇는 을乙 말인데요

도로의 방식으로 잿빛 하늘을 질주하는 발이 없는 새는 열세 번째 새가 맞습니까

 

세상은 무서워하는 아이와 무서운 아이 둘 뿐입니다*

 

생의 트랙은 견고해서 동에서 서로, 다시 서으로 서으로

팽팽 도는 일과성의 질주방식일까요

상자 바깥이 안 보이는데요

죽어서야 온전히 무화될 서열의 키

죽어서야 온전히 벗을 의식의 갑옷

지상의 모든 오늘이 출구가 부재한 까닭이란 거. 맞습니까?

 

열세자리의 길다란 전동차를 끌어다 침상에 눕히고서야 바다의 문이 열리는 지 비로소 미역밭을 유영하는 알몸, 순결한 내 꿈속의 그녀일까요

 

* 이상의 ‘오감도’ 차용

 

 


 

김추인 시인

1947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위보』 『벽으로부터의 외출』 『모든 하루는 낯설다』 『전갈의 땅』 『오브제를 사랑한』 『해일』. 공저 여행집 『다시 사막에서의 열흘』이 있음.  2016년 제9회 한국예술상 수상, 1991년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2010년 만해‘님‘문학상작품상 수상, 2011년 서울 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6년 한국의 예술상 수상, 2017년 제8회 질마재문학상, 2021년 제7회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