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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충성 시인 / 바닷바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0.

문충성 시인 / 바닷바람

 

 

삶이 고달프면 바닷가로 나오라

그곳이 동해거나 서해거나 남해거나

제주 바다가 아니어도 좋다

수평선은 희미하지만 짙푸르지 않아도

언제나 눈 떠 있고

상관없다

흰 구름 두어 점 거느린 파란 하늘

새파랗게 부는 파란 바람

부글부글

불타는 가슴

어루만져줄 바닷바람 한 자락만 있으면

그래

아무 바닷가에 가게 되면

그때

그대여! 말라르메에게로 도주하라

한글로 꿈꾸며 노래하라

 

 


 

 

문충성 시인 / 첫 봄비 내리는 날의 기억

 

 

꽁꽁 얼어붙었던 하늘아

참았던 울음 탁 터놓아

엉킨 실타래 풀려나가듯

내리는 솜털 같은 첫 봄비

하늘아, 조금 성급했니?

무지개도 먼 산에 걸어두고

봄바람도 먼 들판에 재워놓고

꽁꽁 얼어붙었던 땅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거라

가슴속에 키워온

모든 슬픔의 씨앗들

죽어 살던 고통의 뿌리들

연초록 빛으로 꽃 피어나게 하라

솜털 같은 첫 봄비 내린다

온갓 새들아비 내리는 하늘로 파닥파닥

모두 나래 활짝 펴 날아오르라

새봄 새파랗게 찢어놓아라

이승의 끝을 절룩여온 봄바람아

무지개야 하늘 가득 차오르라

봄 나비들아 나를 깨워내다오

저 아득히 먼 연두빛 기억 속에서

 

 


 

 

문충성 시인 / 섬 하나가 만딱

 

 

섬 하나가 만딱 감옥이었주마씸

건너가지 못 허는 바당은 푸르당 버청

보는 사람 가슴까지 시퍼렁허게 만들었쑤게

희영헌 갈매기들 희영허게 날곡

 

눈치 보멍 보말이영 깅이영 톨이영 메역이영

해당 먹엉 살았쑤게 총 든

가마귀들은 불타는 중산간

마을서 시커멍허게 날곡

 

밤이믄 산폭도들 쳐들어오카 부덴

숨도 제대로 못 쉬었주마씸

하늘님아 하늘님아 하늘님까지

누렁허게 무서웠주마씸 경해도

 

경정 살아난 볼레낭 아래서

꿩 새기 봉그곡

불탄 자리엔 고사리들 왕상허게 크곡

구렝이들 허물 벗는

 

석석헌 바름에 눈이 시령 4월

바름 어디선가

자꾸 불어왕

연둣빛으로 꺼꾸러지곡 연둣빛으로

 

무싱거마씸

자유가 어디 있었쑤강

죽음이었주마씸

섬 하나가 만딱

 

 


 

문충성 시인 (1938-2018)

1938년 제주시 출생. 한국외국어대와 동대학원(불어학과 문학박사)을 졸업. 제주신문 문화부장과 제주대 인문대학 교수, 제주작가회의 초대 회장. 1977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1978년 첫 시집 ‘제주바다’를 시작으로 2016년 스물 두 번째 시집 '귀향'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국내 대표 시인으로 활동. 2012년 제22회 편운문학상 외 4건 수상. 2018년 숙환으로 별세(향년 8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