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점 시인 / 장미의 연대
오월의 덩굴장미는 봄에게 씌우는 왕관이다 맥락 없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문장들처럼 매혹적이다
고요이면서 한편으로 소란하다 언제나 욕망을 건드린다 꺾고 싶은 훔치고 싶은 누군가를 부르고 싶은
장미를 건네는 것은 전부를 내어 주는 것 지팡이의 손에서도 장미는 기우뚱거리며 핀다 공동의 장미를 훔치고도 노인은 뻔뻔하다 몸은 낡아도 사랑은 붉다고 주장한다
도서관 왼편 담장은 장미의 바탕이다 장미는 슬몃 책의 제목만을 훑는다
겨울눈의 대척점에는 붉은 장미가 있다
처음의 장미 언제나 유일한 눈 맞춤 뛰는 장미를 좇아 나도 뛴다 뛰는 장미가 모퉁이를 돌 때 힘껏 달린다 장미를 생각하면 이겨낼 수 있는 언덕 참을 수 있는 의자
나는 아직 알량한 일탈을 넘어서지 못한다 울타리 안에서 어둠이 날개를 펴는 골목에서 장미는 혼자 심심하다
시집 『언제나 언니』(파란, 2023) 수록
박홍점 시인 / 푸른차산성으로 가는 길
모두가 잠든 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푸른차산성으로 봄나들이를 간다 챙 넓은 해바라기를 쓰고, 나이를 거꾸로 먹나봐 들뜬 화장은 이제 마흔 살이다
십센치 킬힐 신고 도시락 따위는 필요 없다 입만 있으면 그뿐 살이 오르는 봄햇살만 있으면 그뿐 손에 손을 맞잡은 청춘들이 있고, 노래 속에만 있던 꽃 대궐 들뜬 화장이랑 나는 도란도란 꽃길 베어 먹으며 꽃 속으로 걸어 들어 간다
(탯줄에 입을 대고 빨던 그때가 아니고서는 한 번도 함께 걸어본 적이 없어 말 안 듣는 아이처럼 신발 속에서 자꾸만 발가락이 튕겨져 나오곤 했지)
들뜬 화장은 이제 마흔 살 킬힐을 신고 백리쯤 걸어도 끄떡없는, 꽃들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오른쪽엔 푸른차산성의 돌담이, 왼쪽엔 봉분 같은 지붕들 마을을 이루고
주름과 고요는 꿈을 사이에 두고 뼈와 살은 길을 사이에 두고 봉분들이 부풀어 오르는 봄빛을 받아먹고 배가 부른 날
들뜬 화장과 나는 자매처럼 친구처럼, 어느 순간 얼굴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들린다
비로소 당신의 말들이 들리기 시작해 청산가루도 먼저 먹어보던 리트머스 시험지, 당신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집 『언제나 언니』(파란, 2023)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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