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 시인 / 드라이 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 할 것
골목 끝 수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해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도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대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김경주 시인 /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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