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미정 시인 / 검은 안경을 낀 아버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1.

강미정 시인 / 검은 안경을 낀 아버지

 

 

아빠는 검은 안경을 끼고 오셨어요

어둔 밤이 와도 검은 안경은 벗지 않으셨어요

내가 아빠 얼굴을 바라볼 때면

검은 안경을 낀 아빠는 얼른 고개를 숙였어요

아빠는 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세요?

아빤 왜 검은 안경을 끼세요? 하면

내가 너무 눈부셔서 고개를 숙인 거래요

내가 너무 눈부셔서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거래요

너무 눈이 부시면 눈을 다치거든요

아빠가 그랬어요 나와 헤어질 때

검은 안경을 낀 아빠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내가 너무 눈부셔서 눈을 다친 거래요

선물 많이 사 가지고 또 올게,

눈이 다 나으면 올게 약속했는데요

아직 눈이 다 낫지 않았나 봐요

아빠를 기다릴 때 해를 바라보는데요

눈 다친다, 내 등을 쓸어주시던 아빠 손이 느껴져서

뒤돌아보면 내 눈은 캄캄해지고 눈물이 나요.

또 아빠가 보고싶으냐? 잘 생긴 네 얼굴이 아빠야,

원장님이 지나며 똑같은 말씀을 또 하시겠죠

 

 


 

 

강미정 시인 / 두량짜리 무궁화호 열차

 

 

장맛비 내리는 창에는 창을 바라보는 당신과

입술이 빨간 내가 겹쳐져 있네

 

모처럼 겹쳐진 당신과 내가 어룽어룽 빗물 속으로 흘러가네

 

박꽃으로 지붕을 덮은 넓은 이파리 그늘 속에서

팔락팔락 배추흰나비의 날개짓 소리는 짙고

아무도 지나지 않는 돌담 밑 봉숭아 씨가 톡톡 터지네

 

풋것의 보따리를 발아래 두고 술병을 비워내는 당신과

한 쪽 수족을 쓰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배웅을 받은 나는

 

열차 등받이에 푹 기대지도 못한 채

서로가 가진 여러 생각의 입구를 입술로 꽉 깨물어 여미고

서로 몸 겹쳐지는 창밖의 풍경만 자꾸 눈에 쌓네

 

두량짜리 무궁화호 열차에서 서로 몸 겹친

당신과 나는 생전처음의 연인, 눈을 떼지 못하는

 

팔월 푸른 그믐의 별똥별이

밤하늘을 그으며 두량짜리 무궁화호 열차를 타러 오네

 

 


 

 

강미정 시인 / 여러 겹으로 된 한 통의 연애 편지

 

 

 저렇게, 계단에도 창문에도 전봇대에도 붙어서 우는 매미처럼 저렇게 지겹게 저렇게 표독하게 저렇게 애절하게 생을 다하여 부르는 이름이 한 번 되어 볼래? 생이 다 질 때까지 놓지 않는 독한 향기가 되어 볼래? 애타는 목소리로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우리, 사랑이라는 걸 한번,

 

 해 볼래? 외로워도 외롭다 말못하고 괴로워도 괴롭다 말 못하는 자신을 혼자 버려 두고 싶지 않아서 혼자 견딜 수가 없어서 컴컴한 땅 속으로 자신을 던진 굼뱅이가 매미의 전 생애일거야, 말하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너의 눈물 속에 갇힌다 파르르, 떠는 꽃잎처럼 너는,

 

 운다, 울어도 내 울음소리가 나에게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가서 실컷, 울 수 있는 폭풍우가 몰아쳤으면 좋겠어, 성난 바다로 달음박질쳐 가는 내 가슴속에도 사나운 바다가 있는 모양이야, 노래도 안나오고 눈물도 안나오는 노래연습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울지, 눈물을 저장하는 사람은 몸이 아파, 낙타의 등처럼 네 등에도 아픈,

 

 물혹이 돋는다 틈나면 차에서 들으려고 네가 보내 준 울음소리를 녹음시켰어 햇살이 제법 톡 아프게 쏘기도 하는 이 여름에도 톡 쏘는 추위와 톡 쏘는 배고픔은 따스해서 몸이 신열로 뜨고 삶이 단물 져 무겁지, 내 몸에 붙어서 우는 저 무거운 매미소리 좀 꺼 줄래? 간절히 네 이름만 부르는 저 독기,

 

 


 

강미정 시인

1962년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에 〈어머님의 품〉외 4편으로 우수작품상 등단. 시집으로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상처가 스민다는 것 』 『타오르는 생』 『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등이 있음. 현재 <빈터> 동인, (사)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