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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주 시인 / 드라이 아이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1.

김경주 시인 / 드라이 아이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 할 것

 

골목 끝 수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해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도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대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김경주 시인 /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김경주 시인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과정 음악극창작과 석사.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고래와 수증기』 『시차의 눈을 달랜다』 등이 있고, 그밖의 저서로는 『당신도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 『노빈손의 판타스틱 우주 원정대』 등이 있음. 2009년 제28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