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진 시인 / 바다 옆의 방*
햇살은 사각형으로 눈부시다 그 곁에서 젊음과 닮았던 바다는 조그맣게 푸르다
어쩌면 이것은 망각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빛과 구름과 물결은 한순간도 바꾸지 않고 그저께였고 어제였고 조금 전이었던 시간은 오지 않고 가지 않는다
나쁜 것은 모두 나였다고 자책할 때 눈 뜨지 못하도록 햇살은 반짝이고 햇빛을 빨아들이는 벽은 튼튼하다
아무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울지 않을 때까지 바다만 시리게 바라보는 곳
마른 꽃도 줄 끊어진 기타도 꿈속에서나 나에게 돌아오던 한 사람도 없는 곳
어쩌면 이곳은 천천히 그리고 아름답게 너를 잃기 위해 만든 방인지도 모른다
견뎌야 할 기억이 더 남아있어 내가 간다면 그 빈방으로 가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제목
이운진 시인 / 비둘기 애인
죽은 새를 보았다 죽은 새 곁을 지키는 야윈 새를 보았다 바람과 햇살이 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내 바라보았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새 한 마리의 애인이었던 새 한 마리가 꽃 한 송이 놓지 않고 조용히 작별하는 모습을 지켜주었다
새의 슬픔이 아무리 커도 계절을 멈추게 할 수는 없고 열매가 떨어진다면 그건 바람 때문이라는 게 이별보다 더 억울했지만
이 세상에서 백 년을 살고 난 사람에게나 있을 법한 순순함으로 죽은 새가 두고 간 것들을 챙기는 새 한 마리를 위해 첫 저녁별이 돋는 때 우주에서는 무슨 일인가 꼭 일어났으면 싶었다
이운진 시인 / 별의 부음을 받다
불혹을 넘고 나니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다고 이미 너무 둥글어졌다고 수천 살 수억 살 먹은 별들에게 말을 하고
목숨 하나쯤은 거뜬히 받아 줄 밤하늘에서 마지막 길을 잃었으면 우주의 먼 구석인 허공에게 말을 하다가
신의 정원에서 홀로 피었다 지는 풀꽃처럼 소박한 이름으로 사는 하소연을 제일 빛나는 별빛에게 하려던 중이었는데,
그 큰 별은 무한의 너머로 가지 않고 이 지상의 어둠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장 현명한 슬픔 하나를 이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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