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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주님의 종이오니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5.
주님의 종이오니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주님의 종이오니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50년, 캔버스 위에 유화, 72×43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권용준 안토니오(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19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당시 ‘감상적이고 맥 빠진 예술’, ‘고전고대나 미켈란젤로 또는 티치아노를 모방하는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예술’에 반기를 든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이념의 예술을 주창하였다. 헌트, 밀레이, 로세티 등 ‘라파엘 전파’라고 불리는 작가들이 그들로, 이들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해 “진실의 단순함을 무시하고, 열두 제자를 호화스런 자태로, 그리스도를 세속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과거 라파엘로 이전의 시대, 곧 현실과 세속의 감정에 물들지 않은 채 겸허한 자세로 자연에 순응하고 그 자연의 진실을 소박하고 참신한 필치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그림의 내면은 성경, 신화, 문학 작품을 통해 얻은 깊은 정신적 의미로 가득해, 현실과 감각이 지배하는 물질과 현실 세계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일깨우고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환상적 표현에 대한 흥미와 독특한 묘사기법을 통하여 훗날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으며,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년)의 성화‘주님의 종이오니!(Ecce Ancilla Domini!)’를 살펴보자.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1848-49년. 캔버스 위에 유화, 83.2×65.4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97쪽 참조)의 후편이자 쌍을 이루는 성화로, 이 두 그림이 로세티가 그린 유일한 성화이다.

 

‘주님의 종이오니!’를 보면, 그 주제가 루카 복음 1장의 ‘예수 탄생 예고’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얼핏 보더라도 수태고지를 주제로 다룬 과거의 수많은 그림들과는 사뭇 다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마리아에게 접근하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커다란 날개를 단 근엄하고 위압감 있는 자태를 볼 수 없다. 오히려 가브리엘의 모습이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하느님의 말씀과 기적은 평범한 일상, 우리가 영위하는 오늘의 삶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녀인 자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는 마리아 또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경건한 자세로 담담한 순종의 믿음을 보이는 위대한 종교적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믿기지 않는, 한 인간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가브리엘의 말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보인 채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한 나약한 여인으로서 마리아의 모습, 의심하고 당황하며 갈등하는 가련한 인간의 이미지를 선택해서 그렸다.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

 

또한 침상 위의 잠옷 차림으로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리는 조신한 여인의 자태와,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에스(S)자의 율동미 곧 콘트라포스토의 각선미로 나타난 것이, 마리아 역시 일상의 현실에서는 예쁘게 보이기를 원하는 소박한 여인임을 표현한 것 같다. 이처럼 우리의 성모님은 초월적 존재라기보다는 내가 오늘 경험하고 나와 다름없는 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또한 내가 사는 일상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증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가 이런 우리의 현실에 존재하는 평범한 여인임을 의미하는 것을 그녀 앞에 놓인 수예품, 그녀가 완성해서 세워놓은 바느질의 결과물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붉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수를 놓은 것은 순결을 상징하는 마리아의 꽃 백합으로, 마리아와 천사의 옷을 비롯해 그림 전체에 감도는 흰색 이미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 꽃이 지금 천사 가브리엘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마리아에게 내미는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림 속 이 꽃들의 형상이 단순한 상징적 도상이 아닌, 꽃잎과 수술 등 충실한 관찰을 토대로 그려져 있다. 바로 천상의 모후로서보다는 현실 속 평범한 일상의 여인인 마리아의 이미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특히 로세티가 이 그림에 대해 적은 시에서 마리아를 “신의 곁에서 / 조용히 자라고 있는, 천사 - 백합”으로 표현하는 것이, 백합과 마리아의 연관성을 더욱 강하게 전해준다. 천사가 전하는 백합 위에 날고 있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하는 전통적 도상으로, 이 사건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침대 뒤편의 푸른색 가리개는 종교적 열정을 암시하는 자수를 놓은 붉은색 천과 더불어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으로, 아름다운 꿈을 지닌 평범한 처녀의 맑고 깨끗한 내면을 의미한다. 벽면의 등잔불은 흔히 약혼녀나 신부에게는 임신을 바라는 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하느님께 순명하는 마리아의 신앙과 결부시킬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리기 1년 전에 그린 ‘성모 마리아의 소녀시절’에서는 마리아가 어머니 안나 성녀의 도움을 받아 수를 놓는, 이른바 신부 수업을 받는 소녀 곧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루카 1,26-27 참조)의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는데, 붉은 바탕에 완성되지 않은 백합이 ‘주님의 종이오니!’에서는 완성되어 세워져 있다.

 

이 그림의 창밖 정원에는 마리아의 아버지 요아킴 성인이 있는 것이 한 평범한 가족의 이미지로 성가족의 의미를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중앙 화분에도 백합이 자라고 있으며, 정원의 비둘기 역시 성령의 상징이다. 창의 난간 위에 걸쳐진 붉은 옷은 그리스도가 수난 때 입었던 옷을 나타내며, 안나 뒤의 담쟁이덩굴이 감긴 지지대의 모습은 십자가이다.

 

특히 로세티는 자신의 시에서 책을 성모 마리아의 미덕으로, 백합은 순결함을, 일곱 개의 가시가 있는 찔레와 일곱 개의 잎이 있는 종려나무는 성모 마리아의 “크나큰 슬픔과 이에 대한 큰 보답”으로 노래한 것이, 그림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런 전통적 도상에도 당시의 일부 평론가들은 성가족을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린 데 대해 비난을 쏟아 부었으나, 이 그림은 실상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일상의 삶을 통해 전해지고 이루어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로세티가 이렇게 행한 화필의 자국을 보면서 내 오늘의 일상,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전해지는 숭엄한 말씀을 경청할 자세가 되었는지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쯤 되면, 로세티가 라파엘로 이전의 화풍을 통해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한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경건한 말씀 앞에 있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교시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종이오니!’가 원근법과 사실적 표현기법이 서툴다는 이유로 로세티에게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충격을 받아 평생 대중 전시회에 출품하기를 거리끼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는 신앙과 진리보다는 현상과 물질에 쉽사리 현혹되고 눈이 머는 우리들의 변덕스럽고 가련한 심성 때문이 아닐까?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