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은 시인 / 무화과의 순간
생일에 가을비가 내렸다. 당신이 우산을 쓰고 나타났다. 당신은 나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11월의 약속은 빗방울처럼 튀었다. 당신은 펼쳐진 우산을 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빗방울은 먼 곳으로 둥글게 떨어졌다.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 당신이 둥글어지고 있어서 슬펐다.
나는 8일에 태어난 사람, 8이라는 숫자는 두 개의 젖을 감싸고 있는 뱀의 몸통과 같았다. 놀라 소리쳐도 8은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껍질을 찾아 돌아가기로 했다. 당신은 비 오는 생일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섰다. 당신이 약속을 지키게 될까? 나는 당신의 뒤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산은 연기처럼 멀어지고 신발 속에는 붉은 실지렁이들이 뭉쳐있었다.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 : 니체
격월간 『시사사』 2019년 1~2월호 발표
황주은 시인 / 콜로라도에서 콜라라도 한 잔
콜로는 칼라야, 라도는 레드 붉은 땅이라는 뜻 흙이 진짜 붉어 물을 부으면 진한 벽돌색이야 그 흙에 들깨며 상추를 심고 파도 심었지 미국은 파가 비싸
킴스 오리엔탈 마켓은 마늘 냄새 버무려진 소문이 떠돌던 곳 사흘이 멀다 하고 김치를 담가 팔러 보냈지 한 고향 사람끼리 사기를 치고 당할 때 당할 일 없는 가난이 오히려 다행이던 시절
왕소금에 청교도 같던 그땐 싸구려 냉동 피자도 감사히 먹었지 베이비시터도 하고 한글학교 교사도 했는데 도끼로 얼음 깨며 새벽 같이 일자리로 나설 때 눈 덮인 산은 소름 끼치게 고왔는데 그건 참 오래된 이야기
그때 알던 A를 중앙병원에서 마주쳤지 우리 음료라도 한 잔? 콜라를 마실 때마다 생각나는 카페테리아 접시도 닦고 배식도 했던 기억을 서로 덮어두고 너희 나라 전기 들어오느냐고 묻던 에블린도 중고세탁기를 날라 준 마이클도 심장병으로 죽었다는군 콜라와 얼음 사이 떠오르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이것은 붉은 흙 속에 묻은 이야기 흙을 덮을 때는 또 다른 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방학 때면 락스 통을 들고 모텔청소를 다니던 우리가
격월간 『시사사』 2019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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