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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주은 시인 / 무화과의 순간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8.

황주은 시인 / 무화과의 순간

 

 

생일에 가을비가 내렸다. 당신이 우산을 쓰고 나타났다. 당신은 나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11월의 약속은 빗방울처럼 튀었다. 당신은 펼쳐진 우산을 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빗방울은 먼 곳으로 둥글게 떨어졌다.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 당신이 둥글어지고 있어서 슬펐다.

 

나는 8일에 태어난 사람, 8이라는 숫자는 두 개의 젖을 감싸고 있는 뱀의 몸통과 같았다. 놀라 소리쳐도 8은 없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껍질을 찾아 돌아가기로 했다. 당신은 비 오는 생일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섰다. 당신이 약속을 지키게 될까? 나는 당신의 뒤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산은 연기처럼 멀어지고

신발 속에는 붉은 실지렁이들이 뭉쳐있었다.

 

*인간은 가을의 무화과 : 니체

 

격월간 『시사사』 2019년 1~2월호 발표

 


 


황주은 시인 / 콜로라도에서 콜라라도 한 잔

 

 

      콜로는 칼라야, 라도는 레드

      붉은 땅이라는 뜻

      흙이 진짜 붉어 물을 부으면 진한 벽돌색이야

      그 흙에 들깨며 상추를 심고

      파도 심었지

      미국은 파가 비싸

       

      킴스 오리엔탈 마켓은 마늘 냄새 버무려진 소문이 떠돌던 곳

      사흘이 멀다 하고 김치를 담가 팔러 보냈지

      한 고향 사람끼리 사기를 치고 당할 때

      당할 일 없는 가난이 오히려 다행이던 시절

       

      왕소금에 청교도 같던 그땐 싸구려 냉동 피자도 감사히 먹었지

      베이비시터도 하고 한글학교 교사도 했는데

      도끼로 얼음 깨며 새벽 같이 일자리로 나설 때

      눈 덮인 산은 소름 끼치게 고왔는데

      그건 참 오래된 이야기

       

      그때 알던 A를 중앙병원에서 마주쳤지

      우리 음료라도 한 잔?

      콜라를 마실 때마다

      생각나는 카페테리아

      접시도 닦고 배식도 했던 기억을 서로 덮어두고

      너희 나라 전기 들어오느냐고 묻던 에블린도

      중고세탁기를 날라 준 마이클도 심장병으로 죽었다는군

      콜라와 얼음 사이 떠오르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이것은 붉은 흙 속에 묻은 이야기

      흙을 덮을 때는 또 다른 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방학 때면

      락스 통을 들고

      모텔청소를 다니던 우리가

 

격월간 『시사사』 2019년 1~2월호 발표

 


 

황주은 시인

서울교대 졸업. 콜로라도 프론트레인지 컬리지 수료.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전문가 과정수료. 2013년 《시사사》로 등단. 메디슨 위스컨신 한글학교 교사역임. 현재성북교육지원청 영어센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