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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령 시인 / 나의 정원에 핀 아도르노식의 망상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27.

이령 시인 / 나의 정원에 핀 아도르노식의 망상

 

 

        죽기 전에 죽지 않으려고

        짬짬이 죽어두기로 했나보다

         

        사랑을 잃고 오랫동안 내가 그랬다

         

        혼잣말의 발화는 대체적 어둠의 소관이겠고

        뙤약볕쯤이야 한 계절 아름답게 품었을 테지만

        사실 어떤 개화든 피가 돌아 생명이겠지만

        가끔 그로테스크하게 죽음 너머 사는 생도 있다

         

        지금 바싹 말라 죽은 듯 살아있는 이 꽃대는

        긴 삶의 고통을 순간적 고통으로 변장하고

        찰나에 피고 영원을 사르는 정교하게 손질된  

        어떤 종합적 소멸에 드는 꿈을 꾸는 중일까

         

        염천아래 내 화단엔 그 순간이 자주 왔다, 자주 갔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새순이 돋는 것처럼

        이젠 나도 무뎌져 다발성의 통점들을 다독일 줄 안다

        정작 이 말을 부려놓고 난감한 건 도무지

        증명할 수 없다는 거다

         

        저 꽃대를 거쳐 갔을

        이유 없이 휘몰아쳤을

        허락 없이 내 창을 흔드는 저 바람의 거처를

        저도 모르게 피고 지는 이유를 물을 수 없다는 거다. 다만

         

        쉬이 마침표를 찍지 못 할 계절이 몇 해는 더

        반복될 거라는 확신만이 선명하게 돋음 될 뿐.

 

계간 『문장』 2018년 가을호 발표

 


 

이령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2015년 한중작가 공동시집 『망각을 거부하며』출간. 현재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 젊은 시 동인 〈Volume> 회장.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