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서령 시인 / 구멍론
나는 지독한 어둠, 단 한 번도 내 속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잔인한 안식, 내 심장의 박동조차 나를 방해하지만 찾아드는 사람들을 거부할 수 없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고통으로 웃자란 나는 세상의 비밀과 함께 더욱 은밀하고 깊어진다.
한 여자, 내게 숨어든다.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안간힘으로 이면의 경계를 허문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집이 돼준다. 여자의 혀는 붉고, 쓰고, 비려서 축축하고 컴컴한 나조차도 뱉어내고 싶었다. 그 여자 며칠씩 내게 머물다 떠난다. 완고한 침잠을 꿈꾸지만 그녀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단절은 소통이라는 욕구를 내포한다.
쥐구멍, 개구멍, 뒷구멍, 똥구멍, 멍, 멍, 멍, 긴 세월 수치스러운 지시어로 불리며 나는 묵묵히 세상의 안과 밖을 연결한다.
축축하고 캄캄한 비밀을 나누어 가진 우린 서로에게 숨구멍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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