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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서령 시인 / 구멍론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27.

임서령 시인 / 구멍론

 

 

나는 지독한 어둠, 단 한 번도 내 속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잔인한 안식, 내 심장의 박동조차 나를 방해하지만 찾아드는 사람들을 거부할 수 없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고통으로 웃자란 나는 세상의 비밀과 함께 더욱 은밀하고 깊어진다.

 

한 여자, 내게 숨어든다.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안간힘으로 이면의 경계를 허문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집이 돼준다. 여자의 혀는 붉고, 쓰고, 비려서 축축하고 컴컴한 나조차도 뱉어내고 싶었다.

그 여자 며칠씩 내게 머물다 떠난다. 완고한 침잠을 꿈꾸지만 그녀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단절은 소통이라는 욕구를 내포한다.

 

쥐구멍, 개구멍, 뒷구멍, 똥구멍, 멍, 멍, 멍, 긴 세월 수치스러운 지시어로 불리며 나는 묵묵히 세상의 안과 밖을 연결한다.

 

축축하고 캄캄한 비밀을 나누어 가진 우린 서로에게 숨구멍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7월호 발표

 

 


 

임서령 시인

전남 광주에서 출생. 2010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