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분홍 시인 / 오데사 계단
한발 한발 스텝을 섞듯 말을 섞는다.
서먹해진 관계를 좁혀보려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 붙어보지만 당신의 혀는 양파속이다. 내가 백 미터 다가가면 당신은 백 미터 후퇴한다. 당신은 수직이고, 나는 수평이기 때문에
우리의 간격은 제자리에 멈춰있다. 우리가 고층과 저층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고삐 풀린 생각이 방황하는 곳에 임시방편으로 침묵을 말뚝으로 박아 놓는다.
당신의 말과 나의 말이 부딪쳐서 찌그러지기도 하고, 계단 아래로 위태롭게 굴러 갈 때가 있다. 거기에는 당신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나의 말도 있다. 모든 스텝에선 화약 냄새가 풍긴다.
헐은 내장처럼 장 누수가 있는 말,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한 당신의 말에 변비가 있다.
계간 『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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