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 시인 / 나의 정원에 핀 아도르노식의 망상
죽기 전에 죽지 않으려고 짬짬이 죽어두기로 했나보다
사랑을 잃고 오랫동안 내가 그랬다
혼잣말의 발화는 대체적 어둠의 소관이겠고 뙤약볕쯤이야 한 계절 아름답게 품었을 테지만 사실 어떤 개화든 피가 돌아 생명이겠지만 가끔 그로테스크하게 죽음 너머 사는 생도 있다
지금 바싹 말라 죽은 듯 살아있는 이 꽃대는 긴 삶의 고통을 순간적 고통으로 변장하고 찰나에 피고 영원을 사르는 정교하게 손질된 어떤 종합적 소멸에 드는 꿈을 꾸는 중일까
염천아래 내 화단엔 그 순간이 자주 왔다, 자주 갔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새순이 돋는 것처럼 이젠 나도 무뎌져 다발성의 통점들을 다독일 줄 안다 정작 이 말을 부려놓고 난감한 건 도무지 증명할 수 없다는 거다
저 꽃대를 거쳐 갔을 이유 없이 휘몰아쳤을 허락 없이 내 창을 흔드는 저 바람의 거처를 저도 모르게 피고 지는 이유를 물을 수 없다는 거다. 다만
쉬이 마침표를 찍지 못 할 계절이 몇 해는 더 반복될 거라는 확신만이 선명하게 돋음 될 뿐.
계간 『문장』 2018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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