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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상 시인 / 출애급기(出埃及記) 별장(別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26.

구상 시인 / 출애급기(出埃及記) 별장(別章)

 

 

각설(却說), 이때에 저들도

황금의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

 

믿음이나 진실, 사랑과 같은

인간살이의 막중한 필수품들은

낡은 지팡이나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서로 다투어 사람의 탈만 쓴

짐승들이 되어갔다.

 

세상은 아론*의 무리들이 판을 치고

이에 노예근성이 꼬리를 쳤다.

 

그 속에도 시나이산에서 내려올

모세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외롭지만 있었다.

 

자유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후유, 멀고 험하기도 하다.

 

* 아론: 구약성서 `출애급기'에 나오는 인물로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데 앞장을 섬.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풀꽃과 더불어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구상 시인 / 하일서경(夏日敍景)

 

 

1 아침

 

산과 마을과 들이

푸르른 비늘로 뒤덮여

눈부신데

 

광목처럼 희게 깔린 농로(農路) 위에

도시에선 약 광고에서나 보는

그런 건장한 사내들이

벌써 새벽 논물을 대고

돌아온다.

 

2 낮

 

`이쁜이'가 점심함지를

이고 나서면

`삽살이'도 뒤따른다.

 

사내들은 막걸리 한 사발과

밥 한 그릇과

단잠 한숨에

거뜬해져서 논밭에 들면

해오리 한 쌍이

끼익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난다.

 

3 저녁

 

저녁 어스름 속에

소를 몰아

지게 지고 돌아온다.

 

굴뚝 연기와

사립문이 정답다.

 

태고(太古)로부터

산과 마을과 들이

제자리에 있듯이

 

나라의 진저리나는

북새통에도

이 원경(原景)에만은

안정이 있다.

 

구상문학선, 1975

 

 


 

구상(具常 1919년-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 구상준(具常浚). 호(號)는 운성(暈城). 1919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출생.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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