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인 / 출애급기(出埃及記) 별장(別章)
각설(却說), 이때에 저들도 황금의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
믿음이나 진실, 사랑과 같은 인간살이의 막중한 필수품들은 낡은 지팡이나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서로 다투어 사람의 탈만 쓴 짐승들이 되어갔다.
세상은 아론*의 무리들이 판을 치고 이에 노예근성이 꼬리를 쳤다.
그 속에도 시나이산에서 내려올 모세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외롭지만 있었다.
자유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후유, 멀고 험하기도 하다.
* 아론: 구약성서 `출애급기'에 나오는 인물로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데 앞장을 섬.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풀꽃과 더불어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이제 여기 존재한다.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구상 시인 / 하일서경(夏日敍景)
1 아침
산과 마을과 들이 푸르른 비늘로 뒤덮여 눈부신데
광목처럼 희게 깔린 농로(農路) 위에 도시에선 약 광고에서나 보는 그런 건장한 사내들이 벌써 새벽 논물을 대고 돌아온다.
2 낮
`이쁜이'가 점심함지를 이고 나서면 `삽살이'도 뒤따른다.
사내들은 막걸리 한 사발과 밥 한 그릇과 단잠 한숨에 거뜬해져서 논밭에 들면 해오리 한 쌍이 끼익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난다.
3 저녁
저녁 어스름 속에 소를 몰아 지게 지고 돌아온다.
굴뚝 연기와 사립문이 정답다.
태고(太古)로부터 산과 마을과 들이 제자리에 있듯이
나라의 진저리나는 북새통에도 이 원경(原景)에만은 안정이 있다.
구상문학선,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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