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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ㄴ과 ㅁ 사이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28.

강순 시인 / ㄴ과 ㅁ 사이

 

 

        함박눈이 오고 나서

        햇살이 방향을 바꾸었다

        햇살은 ㄴ과 ㅁ사이로 미끄러지며

        길을 버리고 바쁘게 달아났다

         

        내가 ㄴ이었던가 당신이 ㅁ이던가

        시간을 잃어버린 게 ㄴ안이든 ㅁ밖이든

        행복한 자들은 관심이 없다

         

        태양도 잠시 지치겠지

        ㄴ과 ㅁ 사이로 눈이 내려 길은 꽁꽁 얼어붙는다

        온종일 햇살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 자들

        밤거리에서 ㄴ 혹은 ㅁ을 무작정 기다린다

         

        버스가 오지 않는 밤

        ㄴ과 ㅁ이 죽음을 맞기 딱 좋은 길 위

        ㄴ과 ㅁ사이로 누군가가 미끄러지다

        다가오는 눈빛 밖으로 ㄴ과 ㅁ이 밀려난다

         

        헐거운 옷을 입은 자들이 손 비비며

        은밀한 기도로 햇살을 불러들이는 거리

        유신론자들이 가식을 숭배하는

        잔인한 12월, 밤 가운데

         

        ㄴ과 ㅁ 사이로 문장이 닿을 지도 몰라

        오래 전 영화 ET의 한 장면처럼

        손가락 끝에 삶을 모으고

        길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자들을 본다

        ㄴ안으로 ㅁ 밖으로 크리스마스 캐롤 들린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1월호 발표

 


 

강순 시인

제주에서 출생.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외 4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