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 시인 / ㄴ과 ㅁ 사이
함박눈이 오고 나서 햇살이 방향을 바꾸었다 햇살은 ㄴ과 ㅁ사이로 미끄러지며 길을 버리고 바쁘게 달아났다
내가 ㄴ이었던가 당신이 ㅁ이던가 시간을 잃어버린 게 ㄴ안이든 ㅁ밖이든 행복한 자들은 관심이 없다
태양도 잠시 지치겠지 ㄴ과 ㅁ 사이로 눈이 내려 길은 꽁꽁 얼어붙는다 온종일 햇살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 자들 밤거리에서 ㄴ 혹은 ㅁ을 무작정 기다린다
버스가 오지 않는 밤 ㄴ과 ㅁ이 죽음을 맞기 딱 좋은 길 위 ㄴ과 ㅁ사이로 누군가가 미끄러지다 다가오는 눈빛 밖으로 ㄴ과 ㅁ이 밀려난다
헐거운 옷을 입은 자들이 손 비비며 은밀한 기도로 햇살을 불러들이는 거리 유신론자들이 가식을 숭배하는 잔인한 12월, 밤 가운데
ㄴ과 ㅁ 사이로 문장이 닿을 지도 몰라 오래 전 영화 ET의 한 장면처럼 손가락 끝에 삶을 모으고 길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자들을 본다 ㄴ안으로 ㅁ 밖으로 크리스마스 캐롤 들린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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