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시인 / 이후에는
피할 수 없이 나무는 공허해져 갔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에게서 멀어져 아이들에게 더 가까워지고
허기는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의 별을 보다가 다시 이불을 찾아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이불 속 온기는 부드럽고 조용했으며 과식하는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불편한 속을 다스려주기도 했습니다
개들은 간혹 앞서서 두 발로 걷기도 하지만 기계를 물려받은 우리는 기계처럼 일어나 걷는 습관으로 저녁에는 두 발을 어디에 둬야 할지 숙고했습니다
모두들 황급히 걷고 황급히 사라지는 곳이지만 아무도 아무 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증식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자꾸만 올라가고 나무는 유례없이 앙상하여 과식은 나쁩니다 특히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고 두 발로 걸어가십시오 그곳이 어디든 괜찮습니다
좀 오래 걷다가 휴일이 오면 아이들보다 먼저 어른이 되십시오
우리는 기계를 물려받은 적이 없지만 기계처럼 걷고 있습니다 고마워서 기계로부터 멀어지지 못합니다
이후의 일에 대해 낙담은 금물입니다 나무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공허하지만 결코 여기를 떠나지 않습니다
두 발로 더 걸으셔야 됩니다 그보다 더 이상 좋은 것은 없습니다 여기보다 더 좋은 곳도 없습니다
기계는 결코 현혹되지 않습니다 미래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만이 필요합니다
기계적인 판단이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간입니다
계간 『시인수첩』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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