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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기석 시인 / 음시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2.

함기석 시인 / 음시

 

 

      오늘밤 장미는 세계의 반(反)기획이다

      죽은 자들의 죽지 않는 발이 해저를 걷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이다

      천둥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아픈 발을 뿌리내릴 때

      소리는 빗물이 꾸는 가시 꿈, 사방에서 악의 술어들이 취하고

       

      우리는 우리의 주검에 핀 살의 현상이고 음시다

      수천의 혀를 날름거리며 피 흘리는 사전, 그것이 내 몽이다

      에포케 씨가 살로 세계를 쓸 때, 끝없이 제 살을 찢어 흰 숨결에 섞는 파도

      그것 또한 내 몸이니, 연기 내며 비는 귀부터 타오르고

       

      오늘밤 장미는 견고한 유머고 종이요새다

      벼락 속에서 지상의 모든 이름을 버린 어휘들이 태어나 웃을 때

      섬광으로 피는 꽃들은 혼들의 무수한 편재다

      백(白)과 골(骨) 사이, 밤은 늘 검은 수의를 입고 창가를 서성이므로

       

      거대한 홀이 뚫린 이 세계의 중앙국 음부에서

      (이 괄호 안의 세계가 open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제2의 주어

      당신은 언어 속에서 살해되는 ING 생체다

      (이 비극의 괄호 밖 세계도 open임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제3의 주어

      나도 이미 언어 속에서 화형 중인 ING 사체이니

       

      장미는 장미의 유턴이고 돌에 고인 번개다

      장미는 시가를 물고 흑풍 속에서 백발을 흩날리는 양초인간

      이 비극을 빗줄기는 흰 척추를 드러낸 채 밤새 대지에 음사하는데

      이 참극을 새들은 살을 흩뿌려 잠든 잠을 깨우는데

       

      망각되지 않는 어휘들, 오랜 연인처럼 내 살 속 해저를 걷고 있다

      죽은 자들의 목이 해파리처럼 수면으로 떠오르고

      절벽 위엔 팔만사천 개의 손들이 공중을 한 장 한 장 찢어 날리고

      흰 사리 문 목어들이 북천에서 헤엄쳐오니

       

      오늘밤 장미는 불의 유마경, 얼음의 유머경이다

      산 자들의 죽은 발이 꽃밭을 걷고 있다 그곳 또한 내 몸의 적도이니

      에포케 씨는 펜을 던져, 천둥이 살던 지하의 관시를 파묘하라

      악의 술이 번지고 번져 닿는 저 세계의 실뿌리들

 

계간『시와 사상』 2018년 가을호 발표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국어선생은 달팽이』(세계사, 1998)와 『착란의 돌』(천년의시작, 2002), 『뽈랑공원』(랜덤하우스, 2008) 그리고 동화 『상상력 학교』(대교출판, 2007)가 있음.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