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시인 / 어떤 형식
파티에 초대받았다. 우리는 다탁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너도 나도 형식을 꺼낸다. 형식적이면 안 되는 자리 품격을 다해서 형식을 나눈다.
형식이 양송이 수프처럼 모자랄 때 메인 요리처럼 격식을 꺼낸다 품위 있게 가장이 형식을 가리지 않게 형식이 내용을 앞서지 않게 우리는 안면 가득 웃음을 꺼낸다.
쉿! 파티가 드레스 자락처럼 길어질수록 형식은 형식적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가끔씩 술잔을 부딪치면서 마지막 남은 형식을 탈탈 털어 꺼내 쓴다.
파티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도 좋아. 형식에게 마지막 즙을 다 짜내 바칠 때까지 오늘을 무사히 건널 수 있다면.
계간 『사이펀』 2016년 창간호 발표
김나영 시인 / 겨를
귀뚜라미 무릎 뒤에서 음이 톡톡 튑니다. 그 명랑한 무릎에 탁한 귀를 내려놓고 묵은 베개를 꺼내 햇볕 아래 이리저리 굽고 있으면 내 폐부와 심장과 간도 햇볕 아래 널어놓고 싶어집니다.
오늘 이 시간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사람. 모처럼 도착한 여기(餘機), 쓰고 남은 햇볕이 득달같이 끼어들고 달라붙고 스며듭니다.
울 안 토란대에 보랏빛 살집이 차오르고 담 너머 살찐 생선 굽는 냄새가 타닥타닥 익어가고 찻물 내리는 소리가 찻잔에 무심하게 번지고 평상에 스멀대던 바람이 내 발가락을 천천히 어루만지면 내 눈은 순하게 감기고 입꼬리는 저절로 올라가고
아, 나는 이렇게 쉬운 일에 멀어져 있던 사람. 분주함의 인질이 되어 어디론가 미쳐가던 사람.
후생(厚生)은 가까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크고 튼튼한 가방 구입하는 데로 나를 끌고 다녔습니다. 잉여 같은 햇볕이 보란 듯이 내 무릎 위로 흘러넘칩니다.
계간 『애지』 2018년 겨울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주은 시인 / 우리는 공들여 슬프게 (0) | 2019.04.11 |
---|---|
배수연 시인 / 조이의 당근밭 외 1편 (0) | 2019.04.11 |
문정영 시인 / 활주로 외 1편 (0) | 2019.04.11 |
서영처 시인 / 그 많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0) | 2019.04.11 |
백인덕 시인 / 연사(連死) (0) | 2019.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