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덕 시인 / 연사(連死)
담장 그늘 속에 앉아 책을 읽는다. “너희 아버지는 죽었니?” 목젖이 타고, 혀가 마른다. 가벼운 실잠자리 한 마리, 구부리지 못한 가운데 손가락을 맴돈다.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 저만치 심심했던 아이가 깨버린 거울 속. 드문드문 이가 빠진 칼이 솟는다. 머리를 빗어주다가 슬쩍 귓불을 당기다가 뜨거운 말씀이 손잡이부터 박힌다. 세상을 겨눈 저 성성한 분노, 칼끝을 반짝이며 학교를 다니고, 다방에 기어들었다. 책장보다 가볍게 노란 꽃잎들이 떨었다. 지진처럼 저 허공을 건너 그늘의 나를 뒤집어엎고, 이리저리 내동댕이쳤다. 모서리를 피해 작은 대가리를 그늘 사방에 문지르고 피 터진 길들에 흔적으로 남은 청춘. --죽지도 않는 아버지, 검은 태양이 오늘의 공책을 불태울 때, 사라진 새끼손가락은 무어라, 무어라 허공에 자꾸 약속을 걸었는데, 아무래도 삶은 멀리 있나 보다. 빈 술병에 입술을 대고 휘, 불어본다. “죽지 않으면 아버지가 아니다” 그렇게 뜨거운 속은 식어갈 테지
계간 『시작』 2015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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