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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인덕 시인 / 연사(連死)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10.

백인덕 시인 / 연사(連死)

 

 

담장 그늘 속에 앉아 책을 읽는다.

“너희 아버지는 죽었니?”

목젖이 타고, 혀가 마른다.

가벼운 실잠자리 한 마리, 구부리지 못한

가운데 손가락을 맴돈다.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 저만치 심심했던 아이가

깨버린 거울 속. 드문드문 이가 빠진 칼이 솟는다.

머리를 빗어주다가 슬쩍 귓불을 당기다가

뜨거운 말씀이 손잡이부터 박힌다.

세상을 겨눈 저 성성한 분노,

칼끝을 반짝이며 학교를 다니고, 다방에 기어들었다.

책장보다 가볍게 노란 꽃잎들이 떨었다.

지진처럼 저 허공을 건너 그늘의 나를

뒤집어엎고, 이리저리 내동댕이쳤다.

모서리를 피해 작은 대가리를 그늘 사방에 문지르고

피 터진 길들에 흔적으로 남은 청춘.

--죽지도 않는 아버지,

검은 태양이 오늘의 공책을 불태울 때,

사라진 새끼손가락은 무어라, 무어라 허공에 자꾸

약속을 걸었는데,

아무래도 삶은 멀리 있나 보다.

빈 술병에 입술을 대고 휘, 불어본다.

“죽지 않으면 아버지가 아니다”

그렇게 뜨거운 속은 식어갈 테지

 

계간 『시작』 2015년 겨울호 발표

 


 

백인덕 시인

한양대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단단함에 대하여』 등이 있음. 현재 계간 『아라문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