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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수연 시인 / 조이의 당근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11.

배수연 시인 / 조이의 당근밭

 

 

몰랐지만 조이는 당근밭을 하나 가지고 있다.

링고(조이의 개)와 나는 그 밭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늘 링고와 나는 당근밭을 구르며 부끄럼 많은 나사를 떠올렸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배배 꼬는 사람은 어디라도 깊이 들어가려고 홈을 만드는 걸까.

저기 카페에 앉아 걱정으로 턱이 길어지는 사람들

턱이 가슴까지 내려올 참이면

당근은 목도 없이 저 혼자 길어진다.

부끄러운 나사는 지독하게 싫었던 순간들 때문에 땅속으로 파고들고

링고와 나는 가만 흙을 토닥인다.

달고 둥근 것들이나 허공에 매달려 발을 구르겠지!

링고가 재채기를 하며 외치고

너는 일관성 없이 편들기를 잘해

눈을 흘기면

당근이지

우린 히히 웃는다.

 

월간 『현대문학』 2018년 5월호 발표

 

 


 

 

배수연 시인 / 포도의 시간

 

 

여름부터 매일 도시락 배급을 받는다.

여기엔 젤라틴 덩어리에 색소를 넣은 딸기잼과 아기 주먹만 한 롤빵이 딸려온다.

이 두 개는 늘 먹지 않는다 이 두 개의 모습은 별로 성의가 없지만

뭔가 성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비둘기를 떠올린다.

비둘기들의 출몰은 대개 불규칙하지만

매주 일요일 아침 9시면 모든 성당에서 미사가 있고 우리는 대개 그 미사에 없다.

해는 거리에 노랗다 버터 발린 눈가루 손에서 흩날린다.

"그래도 우린 누구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 그림자와 성가 부르는 일을 사랑하지. 성가에 맞춰 지휘자처럼 손을 흔들어보는 일도."

오르간연주 울려 퍼진다. 눈을 감고 손끝으로 그리는 하프 모양의 실 루엣.

오르가니스트와 성가대원들은 우리의 작고 우아한 하프를 평생 모르겠지만-

전생에 어린이의 멍든 어깨였던 비둘기 하나 비둘기 둘-

우는 거니?

작은 어깨 빵 위에서 정신없이 들썩이고

신부님처럼 흰 빵을 든다. 공중에 작은 하프 그려본다. 하프 사이로 눈가루 떨어진다. 리드미컬하게

비둘기는 작은

귀로 하프 줄이 떨리는 소리 들은 걸까

검은 바닥에 닿는 부리는 아프지 않은 걸까

내일도 도시락이 올까

포도 먹을래

침대에 앉아 빡빡하게 매달린 검은 눈을 똑똑 따먹으며

우리는 우리의 일을 생각한다.

 

월간 『현대문학』 2018년 5월호 발표

 

 


 

배수연 시인

1984년 제주에서 출생.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조이와의 키스』(민음사, 201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