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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덕수 시인 / 시는 어디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30.

문덕수 시인 / 시는 어디로

 

 

시는 어디로 갔나

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 위를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핵탄두 미사일

 

인도의 새끼코끼리 귀만한

광화문 네거리 플라타너스 새 잎사귀에 머물었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3층 완구점에서 내려

파란 스웨덴 인형의 눈알 속에 숨었나

핸드폰 뚜껑 속 번호의 유령

리모컨으로 조종하면

스크린에 알록달록 빈 그림자들이 뜬다

시는 어디로 갔나

서울역 앞 지하에서 너끈히 사흘을 굶은

풋내기 노숙자들의 체중에 휴지로 밟혔나

 

 


 

 

문덕수 시인 / 내 침실

 

 

신발 밑바닥을 털지 않아도 신장은 투덜대지 않는다

낡은 TV만이 한 대 오롯이 앉은 거실의

벽시계 밑을 탈 없이 지나서

내가 없는 내 방을 들어간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천장은 어제 그대로의 높이여서 안전하고

벽은 10년 전의 그 높이로 날 안아준다

등산모 운동모 맥고모자는 모자걸이에 걸려 있고

오늘은 벗어 걸 아무 것도 없다

내 생일 선물의 빨쁘레질리 카운티스마라도 있지만

사흘 전의 구겨진 와이셔츠도 그대로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의

그리스도의 비밀, 붓다의 입문

아직 못 읽은 신간이 천장을 받치고 있다

 

 


 

 

문덕수 시인 / 프로이트 선생에게

 

 

아내에게 대구탕보다 천원이 더 싼

오징어 뽂음을 주문한다

마을의 쌈지공원

온몸 돌리기 파도타기 줄 당기기 하늘걷기...그때

벤취에 편안히 앉은 두 할머니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있으면 물고 가"

그 앞을 지나면서 나는 허리를 굽히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은 호랑이 띠야. 양띠인 나와 함께 치악산에 가서

나란이 바위에 앉았는데, 호랑이가 무서워 못 오는 거야. 임자는 무슨 띠야?"

"제 아내는 용띠예요"

"용은 호랑이 보다 두 살아래지"

그때 해일이 밀려와 휘어감고 흔드는 우리 집

기둥의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문덕수(文德守) 시인

1928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호는 심산(心山), 청태(靑笞). 홍익대학교 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침묵>, <화석>, <바람 속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64 현대문학상?1978 현대시인상, 1981년 아카데미 학술상, 1985 펜문학상 수상. 시집: {황홀} {선(線)·공간(空間)} {새벽바다} {영원한 꽃밭}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다리놓기} {문덕수시선} {조금씩 줄이면서} {그대, 말씀의 안개} 등. 홍익대학교 교수. 2020.3.13 타계(향년 92세).<1928-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