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수 시인 / 시는 어디로
시는 어디로 갔나 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 위를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핵탄두 미사일
인도의 새끼코끼리 귀만한 광화문 네거리 플라타너스 새 잎사귀에 머물었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3층 완구점에서 내려 파란 스웨덴 인형의 눈알 속에 숨었나 핸드폰 뚜껑 속 번호의 유령 리모컨으로 조종하면 스크린에 알록달록 빈 그림자들이 뜬다 시는 어디로 갔나 서울역 앞 지하에서 너끈히 사흘을 굶은 풋내기 노숙자들의 체중에 휴지로 밟혔나
문덕수 시인 / 내 침실
신발 밑바닥을 털지 않아도 신장은 투덜대지 않는다 낡은 TV만이 한 대 오롯이 앉은 거실의 벽시계 밑을 탈 없이 지나서 내가 없는 내 방을 들어간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천장은 어제 그대로의 높이여서 안전하고 벽은 10년 전의 그 높이로 날 안아준다 등산모 운동모 맥고모자는 모자걸이에 걸려 있고 오늘은 벗어 걸 아무 것도 없다 내 생일 선물의 빨쁘레질리 카운티스마라도 있지만 사흘 전의 구겨진 와이셔츠도 그대로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의 그리스도의 비밀, 붓다의 입문 아직 못 읽은 신간이 천장을 받치고 있다
문덕수 시인 / 프로이트 선생에게
아내에게 대구탕보다 천원이 더 싼 오징어 뽂음을 주문한다 마을의 쌈지공원 온몸 돌리기 파도타기 줄 당기기 하늘걷기...그때 벤취에 편안히 앉은 두 할머니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있으면 물고 가" 그 앞을 지나면서 나는 허리를 굽히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은 호랑이 띠야. 양띠인 나와 함께 치악산에 가서 나란이 바위에 앉았는데, 호랑이가 무서워 못 오는 거야. 임자는 무슨 띠야?" "제 아내는 용띠예요" "용은 호랑이 보다 두 살아래지" 그때 해일이 밀려와 휘어감고 흔드는 우리 집 기둥의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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