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종숙 시인(화순) / 물빛 같은 숨결로만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

김종숙 시인(화순) / 물빛 같은 숨결로만

 어머니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당신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습니다

 아들아, 세상에는 저 물빛 같은 숨결로만 느껴야 하는 이름이 있단다 오로지 자음과 모음으로만 그리워해야할 세 음절

 역사는 지우고 당신은 망각하고 세상과 나는 몰라야 하는 그날 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반군을 잡겠다던 토벌군에게 주민들은 청야淸野의 대상

 화순읍 열두 개 면, 백아산과 모후산 화학산과 천태산 또 또, 천왕산과 두봉산은 사람을 품어내느라 안간힘을 썼으나 국가는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인공기를 앞세운 인민군복장의 인민군들, 인민공화국만세를 강요했으나 알고 보니 빨치산과 부역자 색출을 위해 파 놓은 토벌대의 함정

 총구 앞에 허름해진 목숨들은 제 집 마당에서 김채골에서, 봉동마을에서, 도장마을과 동두산 마을에서 원천리에서, 복암리 구봉산아래서 유마리 마을앞 논바닥에서 다산리 마을회관에서 주산리에서 삼미마을에서, 용촌마을에서 송단리에서, 서리에서 수양산 기슭 월산마을에서 야사리에서, 동유마을에서 와천리에서 암곡리에서, 마산리에서 장동리에서, 천변리에서 ... 망개 열매처럼 붉은 피 쏟으며 넘어갔습니다

 어떤 목숨들은 빨갱이 부역자로 지목당해 넘어가고 어떤 목숨들은 잠결에 어떤 목숨들은 잠재적 빨치산으로 간주되고 어떤 목숨들은 군경에 쫓겨 산사람이 된 아들 대신 대살 되고 또 어떤 목숨들은 이유가 없고

 이들 중 또 어떤 목숨들은 "돈을 가져오면 내 준다" 는 교환 값으로

 군경의 군홧발이 지나가자 다시 국가는 남은 피붙이를 향해 분쇄작업에 돌입했는데……. 당신은

 당신은 당부하셔요

 입을 봉쇄해라

 저 물빛 같은 숨결로만 느껴라

 

-시집 <동백꽃 편지>에서

 

 


 

김종숙 시인(화순)

전남 화순 남면에서 출생. 광주에서 성장, 2007년 『사람의 깊이』에 ‘시’, ‘해후’ 외 9편으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 순천작가회의 사무국장 등을 엮임. 첫 시집 <동백꽃 편지>.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민족문학연구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