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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현석 시인 / 물방울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

조현석 시인 / 물방울석

 

 

돌 하나 내게로 왔다

수억 년 고요의 지층 깊이 갇혔다가

태양의 지표면 온도만큼

뜨거운 지구의 핵(核)을 품었다가

햇살 서늘한 어느 날 단단하게 식어

강가로 흙 묻은 몸으로 느리거나

또는 세찬 물살에 몸단장하며 뒹굴다가

구석구석 둥글게 다듬어진 돌 하나

내게로 왔다 거무튀튀하게 닳은 돌

 

비 오는 날 뿌연 유리창에

무수하게 붙잡힌 빗방울들

뜨거웠던 희망의 한 때의 열정의 끝

또는 절망의 끝까지 맛본 고백 못하고

길고 긴 침묵의 덩어리 맺히고 맺혀

태양의 흑점(點)처럼 검게 돋아나

녹이 난 금화 같은 무늬 도드라진 채

검은 좌대 위에 공손하게 눌러앉아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 곁에 섰다

물방울석 하나 내 눈 앞에 왔다

 

 


 

 

조현석 시인 / 모나미153 검정 볼펜

 

 

검정 볼펜이 거북 등껍질 같은 손등에서 빙글빙글 도는 곳

예전이나 지금도 시끄럽고 번잡스러워 오히려 적막한 곳

하루하루가 서럽고 잔혹해도 악의 따위는 품지 않는 곳

끔찍한 탄생과 흥겨운 죽음을 수십, 수백 번 공유하는 곳

불치병에 걸려도 치료조차 않고 죽기 직전까지 방치하는 곳

숨이 목에 닿아도 단말마 비명의 유서마저 쓴 적이 없는 곳

말할 수 없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들 난무하는 곳

닳아빠진 사람들은 한 번도 사랑도 죽음도 생각지 않는 곳

끝없을 듯 빙빙 돌던 볼펜이 한순간 멈춰 곧게 일어서는 순간

휘황찬란한 세상의 끝,

빛 아니면 어둠의 기억만으로 남는 곳

 

 


 

 

조현석 시인 / 손가락 끝

 

 

 이른 새벽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 부음訃音 소식를 받고

 깨어나지 않는 잠, 꿈속인 듯

 억울하고 슬퍼서 잠시 운다

 

 친구와 후배들에게 메시지 찍으려는데 손목과 팔이 떨리고 손가락 끝마저 힘이 빠진다 눈물이 가린 작은 자판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자 음과 모음이 따로 찍히며 자꾸 오타만 난다

 

 뚝뚝 눈물 떨어진 액정화면

손가락 끝이 눈물 위에서

휘청휘청 미끄러질 때마다

불효의 멍이 짙게 번진다

 

 


 

조현석 시인

1963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도서출판 청하) 『불법, …체류자』(문학세계사) 『염소 울다』(한국문연, 2009) 등과 『사랑을 말하다』등 여러 권의 시화집이 있음. 현재 도서출판  북인(BOOK IN)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