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석 시인 / 물방울석
돌 하나 내게로 왔다 수억 년 고요의 지층 깊이 갇혔다가 태양의 지표면 온도만큼 뜨거운 지구의 핵(核)을 품었다가 햇살 서늘한 어느 날 단단하게 식어 강가로 흙 묻은 몸으로 느리거나 또는 세찬 물살에 몸단장하며 뒹굴다가 구석구석 둥글게 다듬어진 돌 하나 내게로 왔다 거무튀튀하게 닳은 돌
비 오는 날 뿌연 유리창에 무수하게 붙잡힌 빗방울들 뜨거웠던 희망의 한 때의 열정의 끝 또는 절망의 끝까지 맛본 고백 못하고 길고 긴 침묵의 덩어리 맺히고 맺혀 태양의 흑점(點)처럼 검게 돋아나 녹이 난 금화 같은 무늬 도드라진 채 검은 좌대 위에 공손하게 눌러앉아 책상 위 컴퓨터 모니터 곁에 섰다 물방울석 하나 내 눈 앞에 왔다
조현석 시인 / 모나미153 검정 볼펜
검정 볼펜이 거북 등껍질 같은 손등에서 빙글빙글 도는 곳 예전이나 지금도 시끄럽고 번잡스러워 오히려 적막한 곳 하루하루가 서럽고 잔혹해도 악의 따위는 품지 않는 곳 끔찍한 탄생과 흥겨운 죽음을 수십, 수백 번 공유하는 곳 불치병에 걸려도 치료조차 않고 죽기 직전까지 방치하는 곳 숨이 목에 닿아도 단말마 비명의 유서마저 쓴 적이 없는 곳 말할 수 없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들 난무하는 곳 닳아빠진 사람들은 한 번도 사랑도 죽음도 생각지 않는 곳 끝없을 듯 빙빙 돌던 볼펜이 한순간 멈춰 곧게 일어서는 순간 휘황찬란한 세상의 끝, 빛 아니면 어둠의 기억만으로 남는 곳
조현석 시인 / 손가락 끝
이른 새벽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 부음訃音 소식를 받고 깨어나지 않는 잠, 꿈속인 듯 억울하고 슬퍼서 잠시 운다
친구와 후배들에게 메시지 찍으려는데 손목과 팔이 떨리고 손가락 끝마저 힘이 빠진다 눈물이 가린 작은 자판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자 음과 모음이 따로 찍히며 자꾸 오타만 난다
뚝뚝 눈물 떨어진 액정화면 손가락 끝이 눈물 위에서 휘청휘청 미끄러질 때마다 불효의 멍이 짙게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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